‘온전히 평등하고 지극히 차별적인’ 춤꾼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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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햇빛촌 조회 13,010회 작성일 24-07-25 11:27본문
기자명칼럼니스트 서인환 입력 2024.07.25 10:21
평등은 천부적이며 존재 자체는 어떠한 조건이 있더라도 평등하다. 장애가 있어 신체의 일부가 없거나 제대로 사용할 수 없더라도 권리는 동등하게 가지고 있다. 모든 사람에게 중력은 동등하게 작용하고 있듯이 힘은 동등하지만, 각자의 능력은 차별적이다. 권리는 동등하게 보유하더라도 개인이 소유한 사회적 권력은 다르게 행사하듯이, 보유하였다고 진정한 평등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온전한 평등은 추상적 규범이나 이념으로서가 아니라 능력의 측면에서 지극히 차별적인 관계에 놓인 존재들이 상대의 힘을 존중하고 신뢰할 때 달성된다. 힘이 동등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동등하다고 신념을 가질 때 진정한 평등은 회복된다. 힘이 동등하지 않다는 사고가 바로 지극히 차별적인 것이다. 저자는 지극히 차별적인 능력을 지닌 개인들이 서로의 동등한 힘에 주의를 기울일 때 고유성을 회복하고 진정한 세계의 일부가 된다고 하였다. 능력은 언제든지 뒤바뀔 수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평등하다.
우리의 삶이 세상 한판 잘 살고 가는 춤이라면, 저자는 잘사는 법을 터득하고 있다. 춤을 추는 행동은 힘(중력)에 온전히 몸을 맡기고 그 힘에 맞서는 각자의 능력(기예) 사이에서 움직이는 것이 좋은 춤이라고 한다. 잘 추는 춤이 형식과 전통과 규범을 지키면서 잘 단련된 것이라면, 좋은 춤은 몸을 원초적 본능에 맡기는 것이다. 저자는 열심히 사는 것이 잘사는 것이라면, 좋은 삶은 가치 있는 요소로 채운 삶이라는 로널드 드워킨 법철학자의 말을 인용한다.
저자는 춤을 이야기하면서 어린 시절의 성장 과정을 말하고, 춤의 역사를 말하며, 장애인 운동사를 말한다. 그리고 외줄타기를 하는 곡예사가 줄에서 떨어지지 않으려면 건너편을 향해 걸어가는 일만을 생각해야 한다며 왜 춤을 선택했는지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춤을 출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좋은 춤은 신체의 훈련에 의한 기교 이전에 에너지의 발산이며, 영혼과 정신의 반응이며, 좋은 춤을 통해 온전한 존재가 된다.
저자는 어린 시절 장애를 최대한 위장하면서 지냈고, 특수학교 중학생 친구들과 서로 엉켜서 발장난을 하면서 쾌감과 우정을 느꼈다. 고등학교는 일반학교에 진학하였고, 사회복지사를 꿈꾸었다.
저자는 일반학교 진학이 프릭쇼에 나온 세계 같았다고 말한다. 시선은 몸의 테크닉이 필요한데, 스테어(Stare, 흘끗보기)의 시선에는 게이즈(Gaze, 응시하기)로, 게이즈 시선에는 스테어로 응대했다고 한다. 게이즈는 공격적이고 스테어는 방어적이다.
1800년대 서구에서는 인간기형을 무대에 올려 구경거리로 삼았는데, 이를 프릭쇼라고 한다. 흥행을 위해서는 가장 기이하거나 이색적인 것이 필요했다. 차별하거나 비하하는 것과는 또 다른 노골적인 놀잇감이었다. 시민들에게 비친 또 다른 장애인은 동정이었다. 앤 톰슨은 경건함으로 성공한 사람으로 ‘나태함과 편리함은 당신을 녹슬게 합니다. 주님 내 발에 등불을 비추소서’란 문구로 돈을 받았다.
프릭쇼에 강제 유인된 사람도 있었고, 먹고 살기 위해 자발적으로 참여한 사람도 있었는데, 폭력과 착취의 프릭쇼에 장애인 관람객은 무료나 할인 혜택을 주는 경우도 있었다. 이 당시는 문화향유권이 아닌 동정의 행동이었을 것이다. 퀴어가 성소수자 비하 표현이었지만, 지금은 자긍심을 표현하는 말이다. 하지만 프릭은 자긍심으로 발전할 수 없었다. 프릭쇼에 자발적으로 참여한 장애인은 자신의 몸을 판 것일까? 저자는 이에 대한 대답을 유보하면서 모욕당하면서도 수치심을 느끼지 않을 수 있음을 강조한다.
고등학교 시절 책만 파고 있는 저자를 수학문제를 풀 때에는 천정에 올라가서 푼다는 식의 허풍쟁이 친구의 소문 내기로 비장애인이 되었다고 말한다. 허풍이 곤란한 경우도 있겠으나, 싫지만은 않은 경우도 있었을 것이다. 장애는 있으나 장애인이 아닐 수 있고, 장애인의 몸짓을 그대로 드러내어도 자유로운 세계를 찾고 싶었을 것이다.
저자는 춤의 변천사에서 소외된 변방 문화 속에서 살다가 주류 춤을 익힌 다음, 자신의 몸에 박힌 변방의 문화를 녹여 새로움을 창조하고 세계인을 감동시킨 이야기를 들려준다. 발레가 프랑스 귀족의 양식이자 교양이었다가 시들해진 것을 러시아가 자신의 문화 속에 녹여 다시 프랑스로 가져가서 각광 받은 이야기도 들려준다.
춤이 장애를 비하하고 조롱한다고 보는 시각과 양반의 권력을 해체하는 해학적 예술로 보는 시각이 있다. 드라마에서 나이가 든 사람이 할머니 역을 하듯이, 장애 역할을 장애인 당사자가 한다면 장애를 조롱하고 비하하는 것일까? 저자의 춤과의 만남은 일반학교의 진학과 같이 미지의 세계이고, 사랑해야 할 세계였다.
저자는 춤을 전공하고자 시도하면서 비장애인과 공동체가 될 수 있는지 고민한 경험을 이야기했는데, 거부가 그를 그만두게 만들지는 못했다. 장애인의 동작은 비장애인의 입장에서 상투적으로 보면 비틀거리는 것으로 오해하지만 장애인 입장에서는 흔들리는 것이 비틀거리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며, 나름의 질서로 걷는 것이지 무질서가 아니라고 말한다.
달라진 장애인의 문화향유권과 접근권 보장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문화 평등을 논쟁한다. 노인이 일하는 ‘주문이 틀리는 식당’을 사람들이 흥미롭고 즐겁게 이용하는 예를 들면서, 접근성은 도덕적 배려의 문제가 아니라 새로운 질서에 대한 주문으로 나아가는 포용이라고 말한다.
김만리가 장애와 이민, 기구한 가족사와 시대적 암울함 속에서 일본의 ‘푸른잔디회’ 활동을 통해 비장애문화를 거부한다는 장애운동을 전개하면서 극단을 조직하였다. 춤의 활동을 통하여 장애로부터 해방감을 느낄 수 있었고, 그 활동이 세상에 장애를 동등하게 드러내게 만들었다. 단원들 스스로 책임지고 실패할 기회를 주며 책임지는 문화를 만들려고 했다고 저자는 소개한다. 장애인의 주체성과 정체성, 그리고 자기결정권을 몸소 체험하는 기회였던 것이다.
국내 장애인의 춤의 역사를 소개하면서도 어쩌지 못하는 몸과 다양한 방식으로 관계 맺으며 분투하는 가운데 자신들의 고유한 영역을 마침내 발견한 예술가들이라고 평한다. 춤의 공동체는 몸들과 맺는 관계의 바탕이며, 이는 정치적인 행동이라고 말한다.
저자의 춤은 휠체어에 앉아 기교를 부르며, 비장애인의 리더에 몸을 맡기는 춤이 아니다. 휠체어에서 바닥으로 내려와 온몸으로 표현하는 맨발의 기는 춤이다. 커버댄스는 틀에 박힌 모방에 불과하지만, 정체성을 공유하는 집단을 이룬다. 동질성에 관해 열린 태도를 취하면 폐쇄적인 정체성 담론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리고 그 모방은 원본 즉 규범에 가까울 필요는 없다. 장애가 있으면 장애에 적응하는 변형이 되어도 좋다. 그 안에 자신의 것이 있으면 된다.
장애인 춤꾼에게 누군가 어쩌면 그렇게 춤을 잘 추느냐고 묻자, 허공에 몸을 잠깐 멈추면 된다고 대답을 하였다고 한다. 이 말은 기교가 아니라 마음 가는 대로 자연스럽게, 나만의 방식을 찾으라는 말일 것이다.
1913년 파리 상젤리제극장에서 열린 ‘봄의 제전’에서 일어난 대소동을 저자가 언급하면서 규범을 파괴하고 장애인의 동작으로 춤을 추고 야유를 받았다고 말한다. 춤, 광인의 춤은 잘 다듬어진 전통에 치중한 미학이 아니라 가장 당시 제작자 개인이나 시대를 잘 반영한 몰입된 예술이라고 설명한다.
모더니즘은 원시적 매혹을 내포한 현대적 반란이다. 저자는 장애를 운명으로 여기지 않기를 바란다면서 자신이 춤을 하게 된 동기를 운명처럼 말한다. 어떻게 춤을 추게 되었는가라는 질문에 그저 ‘저절로’라고 답한다.
그리고 춤 속에서의 경이로움을 말한다. 이는 매력이며 함께 숨 쉬며 살아있음의 확인이다. 위험한 사람을 구하기 위해 자신을 위험 속에 내던지듯이 순간적으로 저절로 일어나는 경이로움을 춤에서 발견하고 있다. ‘저절로’는 자신을 초월하는 경이로운 힘이다.
저자는 춤을 ‘정당하다’고 말한다. 우리는 흔히 편의시설을 말할 때 ‘정당한’이란 말을 사용한다. 장애를 가진 몸은 합리성이란 이름의 고상한 가치들의 위선을 폭로하고 그 한계를 전복하는 힘이 있다고 믿고 있다.
국내 장애인 춤은 장애인운동 속에 싹텄음을 숨기지 않는다. 그리고 지하철을 세우고 출근길을 막고 바닥을 기는 중증 장애인들과 비교하면서 나서기를 꺼리는 사람에게 법은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고 말한다. 외줄 타는 곡예사는 그 일을 사랑하므로 위대하다. 저자가 바닥을 기는 춤은 가장 삶의 밑바닥을 들추어내는 정당한 일이라고 한다. 법이 주지 못하는 경이와 쾌감과 행복을 정당한 춤은 저자에게 주기에 그는 변호사보다 춤을 선택한 것이 아닐까?
저자는 지하철 바닥을 기는 운동이 있었기에 자신이 춤을 통해 바닥을 기는 것이 가능했다며 자시의 춤이 또 다른 문을 여는 행동이기를 기대하고 있다. 춤은 수단이 아니다. ‘접촉즉흥’과 같이 접촉을 이어가는 순수한 동작 속에서 저자는 평등을 찾는다.
-장애인 곁을 든든하게 지켜주는 대안언론 에이블뉴스(able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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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니스트 서인환 iwser@naver.com
평등은 천부적이며 존재 자체는 어떠한 조건이 있더라도 평등하다. 장애가 있어 신체의 일부가 없거나 제대로 사용할 수 없더라도 권리는 동등하게 가지고 있다. 모든 사람에게 중력은 동등하게 작용하고 있듯이 힘은 동등하지만, 각자의 능력은 차별적이다. 권리는 동등하게 보유하더라도 개인이 소유한 사회적 권력은 다르게 행사하듯이, 보유하였다고 진정한 평등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온전한 평등은 추상적 규범이나 이념으로서가 아니라 능력의 측면에서 지극히 차별적인 관계에 놓인 존재들이 상대의 힘을 존중하고 신뢰할 때 달성된다. 힘이 동등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동등하다고 신념을 가질 때 진정한 평등은 회복된다. 힘이 동등하지 않다는 사고가 바로 지극히 차별적인 것이다. 저자는 지극히 차별적인 능력을 지닌 개인들이 서로의 동등한 힘에 주의를 기울일 때 고유성을 회복하고 진정한 세계의 일부가 된다고 하였다. 능력은 언제든지 뒤바뀔 수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평등하다.
우리의 삶이 세상 한판 잘 살고 가는 춤이라면, 저자는 잘사는 법을 터득하고 있다. 춤을 추는 행동은 힘(중력)에 온전히 몸을 맡기고 그 힘에 맞서는 각자의 능력(기예) 사이에서 움직이는 것이 좋은 춤이라고 한다. 잘 추는 춤이 형식과 전통과 규범을 지키면서 잘 단련된 것이라면, 좋은 춤은 몸을 원초적 본능에 맡기는 것이다. 저자는 열심히 사는 것이 잘사는 것이라면, 좋은 삶은 가치 있는 요소로 채운 삶이라는 로널드 드워킨 법철학자의 말을 인용한다.
저자는 춤을 이야기하면서 어린 시절의 성장 과정을 말하고, 춤의 역사를 말하며, 장애인 운동사를 말한다. 그리고 외줄타기를 하는 곡예사가 줄에서 떨어지지 않으려면 건너편을 향해 걸어가는 일만을 생각해야 한다며 왜 춤을 선택했는지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춤을 출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좋은 춤은 신체의 훈련에 의한 기교 이전에 에너지의 발산이며, 영혼과 정신의 반응이며, 좋은 춤을 통해 온전한 존재가 된다.
저자는 어린 시절 장애를 최대한 위장하면서 지냈고, 특수학교 중학생 친구들과 서로 엉켜서 발장난을 하면서 쾌감과 우정을 느꼈다. 고등학교는 일반학교에 진학하였고, 사회복지사를 꿈꾸었다.
저자는 일반학교 진학이 프릭쇼에 나온 세계 같았다고 말한다. 시선은 몸의 테크닉이 필요한데, 스테어(Stare, 흘끗보기)의 시선에는 게이즈(Gaze, 응시하기)로, 게이즈 시선에는 스테어로 응대했다고 한다. 게이즈는 공격적이고 스테어는 방어적이다.
1800년대 서구에서는 인간기형을 무대에 올려 구경거리로 삼았는데, 이를 프릭쇼라고 한다. 흥행을 위해서는 가장 기이하거나 이색적인 것이 필요했다. 차별하거나 비하하는 것과는 또 다른 노골적인 놀잇감이었다. 시민들에게 비친 또 다른 장애인은 동정이었다. 앤 톰슨은 경건함으로 성공한 사람으로 ‘나태함과 편리함은 당신을 녹슬게 합니다. 주님 내 발에 등불을 비추소서’란 문구로 돈을 받았다.
프릭쇼에 강제 유인된 사람도 있었고, 먹고 살기 위해 자발적으로 참여한 사람도 있었는데, 폭력과 착취의 프릭쇼에 장애인 관람객은 무료나 할인 혜택을 주는 경우도 있었다. 이 당시는 문화향유권이 아닌 동정의 행동이었을 것이다. 퀴어가 성소수자 비하 표현이었지만, 지금은 자긍심을 표현하는 말이다. 하지만 프릭은 자긍심으로 발전할 수 없었다. 프릭쇼에 자발적으로 참여한 장애인은 자신의 몸을 판 것일까? 저자는 이에 대한 대답을 유보하면서 모욕당하면서도 수치심을 느끼지 않을 수 있음을 강조한다.
고등학교 시절 책만 파고 있는 저자를 수학문제를 풀 때에는 천정에 올라가서 푼다는 식의 허풍쟁이 친구의 소문 내기로 비장애인이 되었다고 말한다. 허풍이 곤란한 경우도 있겠으나, 싫지만은 않은 경우도 있었을 것이다. 장애는 있으나 장애인이 아닐 수 있고, 장애인의 몸짓을 그대로 드러내어도 자유로운 세계를 찾고 싶었을 것이다.
저자는 춤의 변천사에서 소외된 변방 문화 속에서 살다가 주류 춤을 익힌 다음, 자신의 몸에 박힌 변방의 문화를 녹여 새로움을 창조하고 세계인을 감동시킨 이야기를 들려준다. 발레가 프랑스 귀족의 양식이자 교양이었다가 시들해진 것을 러시아가 자신의 문화 속에 녹여 다시 프랑스로 가져가서 각광 받은 이야기도 들려준다.
춤이 장애를 비하하고 조롱한다고 보는 시각과 양반의 권력을 해체하는 해학적 예술로 보는 시각이 있다. 드라마에서 나이가 든 사람이 할머니 역을 하듯이, 장애 역할을 장애인 당사자가 한다면 장애를 조롱하고 비하하는 것일까? 저자의 춤과의 만남은 일반학교의 진학과 같이 미지의 세계이고, 사랑해야 할 세계였다.
저자는 춤을 전공하고자 시도하면서 비장애인과 공동체가 될 수 있는지 고민한 경험을 이야기했는데, 거부가 그를 그만두게 만들지는 못했다. 장애인의 동작은 비장애인의 입장에서 상투적으로 보면 비틀거리는 것으로 오해하지만 장애인 입장에서는 흔들리는 것이 비틀거리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며, 나름의 질서로 걷는 것이지 무질서가 아니라고 말한다.
달라진 장애인의 문화향유권과 접근권 보장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문화 평등을 논쟁한다. 노인이 일하는 ‘주문이 틀리는 식당’을 사람들이 흥미롭고 즐겁게 이용하는 예를 들면서, 접근성은 도덕적 배려의 문제가 아니라 새로운 질서에 대한 주문으로 나아가는 포용이라고 말한다.
김만리가 장애와 이민, 기구한 가족사와 시대적 암울함 속에서 일본의 ‘푸른잔디회’ 활동을 통해 비장애문화를 거부한다는 장애운동을 전개하면서 극단을 조직하였다. 춤의 활동을 통하여 장애로부터 해방감을 느낄 수 있었고, 그 활동이 세상에 장애를 동등하게 드러내게 만들었다. 단원들 스스로 책임지고 실패할 기회를 주며 책임지는 문화를 만들려고 했다고 저자는 소개한다. 장애인의 주체성과 정체성, 그리고 자기결정권을 몸소 체험하는 기회였던 것이다.
국내 장애인의 춤의 역사를 소개하면서도 어쩌지 못하는 몸과 다양한 방식으로 관계 맺으며 분투하는 가운데 자신들의 고유한 영역을 마침내 발견한 예술가들이라고 평한다. 춤의 공동체는 몸들과 맺는 관계의 바탕이며, 이는 정치적인 행동이라고 말한다.
저자의 춤은 휠체어에 앉아 기교를 부르며, 비장애인의 리더에 몸을 맡기는 춤이 아니다. 휠체어에서 바닥으로 내려와 온몸으로 표현하는 맨발의 기는 춤이다. 커버댄스는 틀에 박힌 모방에 불과하지만, 정체성을 공유하는 집단을 이룬다. 동질성에 관해 열린 태도를 취하면 폐쇄적인 정체성 담론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리고 그 모방은 원본 즉 규범에 가까울 필요는 없다. 장애가 있으면 장애에 적응하는 변형이 되어도 좋다. 그 안에 자신의 것이 있으면 된다.
장애인 춤꾼에게 누군가 어쩌면 그렇게 춤을 잘 추느냐고 묻자, 허공에 몸을 잠깐 멈추면 된다고 대답을 하였다고 한다. 이 말은 기교가 아니라 마음 가는 대로 자연스럽게, 나만의 방식을 찾으라는 말일 것이다.
1913년 파리 상젤리제극장에서 열린 ‘봄의 제전’에서 일어난 대소동을 저자가 언급하면서 규범을 파괴하고 장애인의 동작으로 춤을 추고 야유를 받았다고 말한다. 춤, 광인의 춤은 잘 다듬어진 전통에 치중한 미학이 아니라 가장 당시 제작자 개인이나 시대를 잘 반영한 몰입된 예술이라고 설명한다.
모더니즘은 원시적 매혹을 내포한 현대적 반란이다. 저자는 장애를 운명으로 여기지 않기를 바란다면서 자신이 춤을 하게 된 동기를 운명처럼 말한다. 어떻게 춤을 추게 되었는가라는 질문에 그저 ‘저절로’라고 답한다.
그리고 춤 속에서의 경이로움을 말한다. 이는 매력이며 함께 숨 쉬며 살아있음의 확인이다. 위험한 사람을 구하기 위해 자신을 위험 속에 내던지듯이 순간적으로 저절로 일어나는 경이로움을 춤에서 발견하고 있다. ‘저절로’는 자신을 초월하는 경이로운 힘이다.
저자는 춤을 ‘정당하다’고 말한다. 우리는 흔히 편의시설을 말할 때 ‘정당한’이란 말을 사용한다. 장애를 가진 몸은 합리성이란 이름의 고상한 가치들의 위선을 폭로하고 그 한계를 전복하는 힘이 있다고 믿고 있다.
국내 장애인 춤은 장애인운동 속에 싹텄음을 숨기지 않는다. 그리고 지하철을 세우고 출근길을 막고 바닥을 기는 중증 장애인들과 비교하면서 나서기를 꺼리는 사람에게 법은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고 말한다. 외줄 타는 곡예사는 그 일을 사랑하므로 위대하다. 저자가 바닥을 기는 춤은 가장 삶의 밑바닥을 들추어내는 정당한 일이라고 한다. 법이 주지 못하는 경이와 쾌감과 행복을 정당한 춤은 저자에게 주기에 그는 변호사보다 춤을 선택한 것이 아닐까?
저자는 지하철 바닥을 기는 운동이 있었기에 자신이 춤을 통해 바닥을 기는 것이 가능했다며 자시의 춤이 또 다른 문을 여는 행동이기를 기대하고 있다. 춤은 수단이 아니다. ‘접촉즉흥’과 같이 접촉을 이어가는 순수한 동작 속에서 저자는 평등을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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