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장애아가족 양육지원사업‥공모전’ 수상작 연재-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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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햇빛촌 조회 12,906회 작성일 24-03-18 10:00본문
장려상 ‘마라톤’
기자명에이블뉴스 입력 2024.03.18 09:00 수정 2024.03.18 09:01
이에 매년 우수사례를 발굴하기 위해 ‘장애아가족 양육지원사업 서비스 이용 및 제공 사례 공모’를 실시, 시상하고 있다. 지난해에는 총 모두 68개 작품을 접수, 심사를 통해 총 8편을 수상작으로 선정한 바 있다.
‘2023년 장애아가족 양육지원사업 서비스 이용 및 제공 사례’ 수상작 중 최우수상 1편, 우수상 2편, 장려상 5편을 연재한다. 다섯 번째는 장려상 ‘마라톤’이다.
마라톤
윤지아((사)제주특별자치도장애인부모회/ 돌봄서비스 이용)
자폐 장애를 가진 아이의 부모라면 한 번쯤 봤을 그 영화, 말아톤.
장애아동을 양육하는 시간은 길고 긴 달리기를 하는 여정이라고 생각한다. 지치고 힘들어도 연습하고 좌절하고 또 연습하면서 사회로 달려 나가는 모습을 꿈꾼다.
이른 나이의 결혼과 자연임신으로 온 일란성 쌍둥이, 온 세상에 축복과 행운이 나에게로 온 것만 같았다. 하지만 임신부터 출산 양육까지의 과정은 그리 순탄치 못했다. 31주의 이른 조산으로 아이들은 신생아 중환자실로 나는 홀로 병실에서 몸조리를 하였다.
하지만 출산의 기쁨도 잠시 하루가 지나기도 전에 신생아 중환자실로 온 소식은 나를 깜짝 놀라게 했다. 동생의 왼발이 6개고 그중 2개가 붙어있는 합다지증이고 쌍둥이 모두 저체중과 수유 중 심장박동이 느려지는 서맥으로 인하여 아이들이 두 달 가량은 병실에서 치료를 받았다. 다행히 매일 면회와 상담을 하면서 치료를 했고 증상은 점차 완화되었다. 퇴원 후 정신없는 육아생활을 지내고 돌 쯤 동생의 합다지증 수술도 무사히 끝낼 수 있었다.
이제 문제는 '나'였다. 하루하루 정신없는 쌍둥이 육아에 '나'라는 사람이 병들어가고 있었다. 평일엔 퇴근 후 쉬고 싶어 하고 주말엔 친구들을 만나고 싶어 하는 남편, 어린이집을 보낸 후 시작된 수족구, 장염, 감기 등등 각종 전염병. 아이들을 데리고 병원가는 것, 밤새 간호하는 것, 밀린 집안일까지 하나도 아닌 둘을 케어하는건 나를 너무 지치게 만들었다.
애들을 재우고 나면 나는 밤새 잠들지 못하고 나의 현실을 비난하며 주변 사람들을 부러워했고, 외출 문제와 육아 문제로 인하여 남편과 싸우게 되면 폭식으로 내 몸을 망가뜨렸다.
나 스스로 우울증이란 것을 인지하면서도 병원에 가지는 못했다. 아이 둘을 데리고 갈수도 없고 돌봐줄 사람도 없었고, 외벌이로 생활하면서 금전적으로도 힘들었었다.
그럼에도 불면증과 폭식은 계속되고, 나는 점점 더 화내고 예민해져 갔다. 이로 인해 내가 애들의 발달문제도 더 회피하지 않았을까 생각한 2주 간격으로 전염병에 걸린 아이를 가정보육하고 집안일을 하고 병원을 데리고 다니며 결국엔 허리 디스크가 터졌다.
나는 걷지도 못하고 119 구조대의 도움을 받아 병원을 갔다. 3일은 일어나지도 못하고 누워서만 생활하고 친정엄마는 나의 병간호를 해주고 아이들은 남편과 시부모님이 번갈아 가면서 케어했다.
3주 입원 하는 동안 처음 일주일은 통증과 입원 후의 병원비 걱정으로 불안에 떨었다. 그 후의 2주일은 처음 느끼는 해방감이었다. 아이들과 집안에서 엄마로 있던 시간에서 벗어나 혼자만 지내보는 여유로운 시간. 얼마나 행복했었는지 퇴원하고 싶지 않을 정도였다. 병원에 있는 시간동안 많은 생각을 하면서 나 자신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아이들의 엄마이지만 온전히 나로 지낼 수 있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래서 일을 구하게 되었다. 아직 아이들이 어리니 오전만 일할 수 있고 내 전공을 살린 알바를 운 좋게 근무하게 되었고, 어린이집 등·하원을 시켜도 무리가 없었다.
그리고 5개월 후 코로나가 시작됐다. 마스크 쓰게 하는 연습부터 어린이집에 아이들을 보내면서도 혹시 모를 불안감에 외출을 단절하며 아이들의 발달지연에 많은 영향이 있었고 첫째 아이의 장폐색으로 인한 수술, 남편과 나 친정엄마, 시어머니 모두 병원에서는 첫째 아이, 집에서는 둘째 아이를 케어했다.
수술 후부터 집안사람들은 모두다 나에게 그만두라고 엄마가 애를 봐야되지 않냐며 다그쳤다. 이기적인 내 마음은 일하는 것을 놓치기 싫었고 사정을 이해해주는 좋은 사장님을 만나 한달의 무급휴가를 받을 수 있었다.
남편은 애가 아픈데도 일을 그만두지 않는 나를 모성애가 없는 엄마 취급을 했다. 시어머니와 친정엄마까지도 내 편은 아무도 없었다. 앞에서 티내지 않는 눈치 속에서도 남편과의 트러블에서도 직장에 양해를 구하고 도움을 받으며 계속 일을 하고 있었다.
내가 일을 하기 위함은 금전적, 또는 사회적으로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창구, 내가 아이들의 엄마가 아닌 한 직장의 직원으로 인정받는 곳이고 나의 숨통을 트이게 할수 있는 곳이었다.
애들 발달이 늦어지면서 각종 검사와 진료를 받고 보니 쌍둥이 모두 장애판정을 받을 만큼의 발달이 지연됐다는 진단을 받았다. 그때의 나는 아이들을 객관적으로 바라보지 못하고 ‘코로나 때문에 활동을 못하면서 그랬을 거야, 이제부터 잘 케어 해주면 돼’라는 잘못된 판단으로 장애판정을 안 받겠다, 언어치료를 병행하면서 발달을 올리겠다 자만했었다.
하지만 내 마음만큼 아이들은 잘 따라오지 못했고 1년 뒤 아이들의 장애를 인정하며 장애등록을 했다. 장애등록을 하면서부터 여러 가지 정보를 많이 접하게 됐다. 그중에서 지금 제일 감사하게 생각하는 건 ‘돌보미 선생님’을 만나게 된 것이다.
지역 주민센터를 통해 필요한 시간동안 아이들의 돌봄을 부탁할 수 있는 장애아가족 양육지원사업을 알게 되었다. 나는 하루 6시간 정도 일하는 알바형식의 일을 다니고 있었고 아이들 등·하원, 센터 픽업시간도 충분했기에 큰 필요성이 없었지만 아이들이 아프거나 급한 일이 있을 때 필요할 듯싶어서 신청을 했었다.
신청 후 지역 장애인 부모회에서 연락이 왔고 상담을 하러 갔다. 나는 6년 동안 내가 쌍둥이들을 양육해왔고 가족 이외의 사람에겐 아이들을 맡겨본 적이 없어서 불안했었고, 약간의 불신이 있었다. 말을 못하고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아이들이기 때문에 정말 최소한의 돌봄만 부탁드리고 싶었다.
나에게 상담해줬던 직원분은 내가 필요시간을 적게 원하니 “매칭된다면 어머니도 급한 일 있을 때, 나의 휴식이 필요할 때 좋을 거예요~”라고 나를 안심시켜주듯 말을 해줬다.
바로 다음날 지금의 돌봄선생님을 만나게 됐고, 일주일동안 선생님의 차로 하원-센터-픽업을 오가며 아이들의 동선과 스케줄을 익혔다. 아이들은 선생님과의 돌봄을 통해 놀이터에서 친구, 형, 누나들과의 사회성 발달에 자극을 받고, 언어자극이 더 향상되었다.
센터에 있는 선생님들과 원장님들은 나에게 “돌봄선생님이 아이들을 잘 챙겨주신다, 아이들과 유대관계가 잘 형성되어 있다”라고 말을 해주기도 했다.
아이들이 배운 것 중 안전벨트를 하고 가만히 앉아있는 법, 혼자 그네를 탈 수 있게 발을 움직이는 법, 옷을 갈아입는 법, 연필을 쥐고 글씨를 쓰는 법 등 다양한 생활환경에 적응할 수 있게 도움을 주셨다.
대소변 실수가 빈번하고 말보다는 행동이 먼저 나오고 울음과 짜증이 가득했던 아이들이 활짝 웃고 자신의 의사표현을 정확히 표현하면서 양해를 구하고 감사함을 표현할 줄 아는 멋진 어린이가 되었다.
순간순간 하지 못했던 것을 해낸 순간 꾸준히 연습하는 모습 등의 사진과 동영상을 보내주시는데 그 속의 아이들의 표정에서 행복함과 즐거움이 묻어나오는 것을 볼 때마다 잘 챙겨주지 못한 내가 미안할 정도이다.
워킹맘으로써 제일 곤란한 상황인 아이가 갑자기 아플 때, 돌봄선생님이 근무하고있는 나를 배려해 대신 병원에 가서 진료를 보고 아이를 돌봐주셨다. 덕분에 업무에 집중을 하고 자리를 잘 잡게 되어 경제적인 부분도 많이 완화되었다.
선생님이 혼자 아이들은 픽업하기 시작한 후, 걱정과는 달리 나도 아이들도 모두 더 발전된 생활을 하게 되었다. 선생님이 픽업을 해주는 시간 동안 주말로 미뤄왔던 청소를 하고, 여유롭게 장을 보고 반찬을 만들기도 하고, 혼자 영화를 보고, 때로는 커피 한잔을 먹으러 가기도 했다.
내가 휴식을 취한만큼 체력을 아끼다 아이들과 더 재밌게 놀아줄 수 있었고, 마음의 여유가 생기니 남편과의 트러블도 서서히 줄어들었고 새벽까지 잠 못자던 불면증도 많이 해소되었다.
그 시간 속에서 나는 엄마도 아니고 직원도 아닌 '나' 로 있을 수 있는 시간이었다. 하루하루 지치고 포기하고 싶었던 마음만이 가득했었는데 어느새 이 시간을 즐기고 있었다. 몸과 마음가짐이 달라진 건 나뿐만이 아니었고 남편도 전과는 달리 아이들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서 아이들의 눈높이를 맞추면서 아이들을 웃게 하는 아빠가 되었다.
전과는 다르게 아이의 장애를 인정하며 못 했던 대화를 진솔하게 하고, 앞으로의 방향성에 대해 진지한 얘기도 나누었다. 서로의 생각과 관점을 이해하고 100%는 아니더라도 멋진 아빠 엄마의 모습으로 지내자 다짐했다.
우리의 변화된 모습은 친정엄마나 이모 삼춘들, 시어머니까지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분위기가 많이 좋아졌고 다들 흐뭇해하시며 너무 좋은 선생님 만나서 다행이라고 감사한 분이라고 항상 말씀해주셨다.
이러한 생활에 적응을 하자 나에게도 정직원이 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근무시간이 길어지고 근무지도 바뀌면서 퇴근시간도 늦어지는 걱정도 있었지만 내 욕심으로는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다행히 돌봄선생님과 시간 조율이 가능했고 덕분에 정직원 제의를 수락할 수 있었다.
처음 돌봄지원사업을 신청할 때만 해도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내가 이젠 좋은 선생님을 만날 수 있게 되서 너무 감사할 따름이다. 나에게 지원사업의 필요성과 휴식시간 안내를 추천해준 직원분도 지원사업 안의 소속된 선생님도, 이러한 지원사업이 있다는 모든 상황이 감사하다.
앞으로 아이들은 사회로 나아가기엔 멀고 먼 길을 차근차근 걸어나가야 할테지만 마라토너 옆을 지켜주는 페이스메이커처럼 선생님의 돌봄과 연습이라면 점차 발전된 모습을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1등이 아닌 꼴등이라도 완주하는 모습을 볼 수 있게 거북이처럼 느리더라도 선생님과 같이 나아가고 싶다.
-장애인 곁을 든든하게 지켜주는 대안언론 에이블뉴스(able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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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명에이블뉴스 입력 2024.03.18 09:00 수정 2024.03.18 09:01
이에 매년 우수사례를 발굴하기 위해 ‘장애아가족 양육지원사업 서비스 이용 및 제공 사례 공모’를 실시, 시상하고 있다. 지난해에는 총 모두 68개 작품을 접수, 심사를 통해 총 8편을 수상작으로 선정한 바 있다.
‘2023년 장애아가족 양육지원사업 서비스 이용 및 제공 사례’ 수상작 중 최우수상 1편, 우수상 2편, 장려상 5편을 연재한다. 다섯 번째는 장려상 ‘마라톤’이다.
마라톤
윤지아((사)제주특별자치도장애인부모회/ 돌봄서비스 이용)
자폐 장애를 가진 아이의 부모라면 한 번쯤 봤을 그 영화, 말아톤.
장애아동을 양육하는 시간은 길고 긴 달리기를 하는 여정이라고 생각한다. 지치고 힘들어도 연습하고 좌절하고 또 연습하면서 사회로 달려 나가는 모습을 꿈꾼다.
이른 나이의 결혼과 자연임신으로 온 일란성 쌍둥이, 온 세상에 축복과 행운이 나에게로 온 것만 같았다. 하지만 임신부터 출산 양육까지의 과정은 그리 순탄치 못했다. 31주의 이른 조산으로 아이들은 신생아 중환자실로 나는 홀로 병실에서 몸조리를 하였다.
하지만 출산의 기쁨도 잠시 하루가 지나기도 전에 신생아 중환자실로 온 소식은 나를 깜짝 놀라게 했다. 동생의 왼발이 6개고 그중 2개가 붙어있는 합다지증이고 쌍둥이 모두 저체중과 수유 중 심장박동이 느려지는 서맥으로 인하여 아이들이 두 달 가량은 병실에서 치료를 받았다. 다행히 매일 면회와 상담을 하면서 치료를 했고 증상은 점차 완화되었다. 퇴원 후 정신없는 육아생활을 지내고 돌 쯤 동생의 합다지증 수술도 무사히 끝낼 수 있었다.
이제 문제는 '나'였다. 하루하루 정신없는 쌍둥이 육아에 '나'라는 사람이 병들어가고 있었다. 평일엔 퇴근 후 쉬고 싶어 하고 주말엔 친구들을 만나고 싶어 하는 남편, 어린이집을 보낸 후 시작된 수족구, 장염, 감기 등등 각종 전염병. 아이들을 데리고 병원가는 것, 밤새 간호하는 것, 밀린 집안일까지 하나도 아닌 둘을 케어하는건 나를 너무 지치게 만들었다.
애들을 재우고 나면 나는 밤새 잠들지 못하고 나의 현실을 비난하며 주변 사람들을 부러워했고, 외출 문제와 육아 문제로 인하여 남편과 싸우게 되면 폭식으로 내 몸을 망가뜨렸다.
나 스스로 우울증이란 것을 인지하면서도 병원에 가지는 못했다. 아이 둘을 데리고 갈수도 없고 돌봐줄 사람도 없었고, 외벌이로 생활하면서 금전적으로도 힘들었었다.
그럼에도 불면증과 폭식은 계속되고, 나는 점점 더 화내고 예민해져 갔다. 이로 인해 내가 애들의 발달문제도 더 회피하지 않았을까 생각한 2주 간격으로 전염병에 걸린 아이를 가정보육하고 집안일을 하고 병원을 데리고 다니며 결국엔 허리 디스크가 터졌다.
나는 걷지도 못하고 119 구조대의 도움을 받아 병원을 갔다. 3일은 일어나지도 못하고 누워서만 생활하고 친정엄마는 나의 병간호를 해주고 아이들은 남편과 시부모님이 번갈아 가면서 케어했다.
3주 입원 하는 동안 처음 일주일은 통증과 입원 후의 병원비 걱정으로 불안에 떨었다. 그 후의 2주일은 처음 느끼는 해방감이었다. 아이들과 집안에서 엄마로 있던 시간에서 벗어나 혼자만 지내보는 여유로운 시간. 얼마나 행복했었는지 퇴원하고 싶지 않을 정도였다. 병원에 있는 시간동안 많은 생각을 하면서 나 자신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아이들의 엄마이지만 온전히 나로 지낼 수 있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래서 일을 구하게 되었다. 아직 아이들이 어리니 오전만 일할 수 있고 내 전공을 살린 알바를 운 좋게 근무하게 되었고, 어린이집 등·하원을 시켜도 무리가 없었다.
그리고 5개월 후 코로나가 시작됐다. 마스크 쓰게 하는 연습부터 어린이집에 아이들을 보내면서도 혹시 모를 불안감에 외출을 단절하며 아이들의 발달지연에 많은 영향이 있었고 첫째 아이의 장폐색으로 인한 수술, 남편과 나 친정엄마, 시어머니 모두 병원에서는 첫째 아이, 집에서는 둘째 아이를 케어했다.
수술 후부터 집안사람들은 모두다 나에게 그만두라고 엄마가 애를 봐야되지 않냐며 다그쳤다. 이기적인 내 마음은 일하는 것을 놓치기 싫었고 사정을 이해해주는 좋은 사장님을 만나 한달의 무급휴가를 받을 수 있었다.
남편은 애가 아픈데도 일을 그만두지 않는 나를 모성애가 없는 엄마 취급을 했다. 시어머니와 친정엄마까지도 내 편은 아무도 없었다. 앞에서 티내지 않는 눈치 속에서도 남편과의 트러블에서도 직장에 양해를 구하고 도움을 받으며 계속 일을 하고 있었다.
내가 일을 하기 위함은 금전적, 또는 사회적으로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창구, 내가 아이들의 엄마가 아닌 한 직장의 직원으로 인정받는 곳이고 나의 숨통을 트이게 할수 있는 곳이었다.
애들 발달이 늦어지면서 각종 검사와 진료를 받고 보니 쌍둥이 모두 장애판정을 받을 만큼의 발달이 지연됐다는 진단을 받았다. 그때의 나는 아이들을 객관적으로 바라보지 못하고 ‘코로나 때문에 활동을 못하면서 그랬을 거야, 이제부터 잘 케어 해주면 돼’라는 잘못된 판단으로 장애판정을 안 받겠다, 언어치료를 병행하면서 발달을 올리겠다 자만했었다.
하지만 내 마음만큼 아이들은 잘 따라오지 못했고 1년 뒤 아이들의 장애를 인정하며 장애등록을 했다. 장애등록을 하면서부터 여러 가지 정보를 많이 접하게 됐다. 그중에서 지금 제일 감사하게 생각하는 건 ‘돌보미 선생님’을 만나게 된 것이다.
지역 주민센터를 통해 필요한 시간동안 아이들의 돌봄을 부탁할 수 있는 장애아가족 양육지원사업을 알게 되었다. 나는 하루 6시간 정도 일하는 알바형식의 일을 다니고 있었고 아이들 등·하원, 센터 픽업시간도 충분했기에 큰 필요성이 없었지만 아이들이 아프거나 급한 일이 있을 때 필요할 듯싶어서 신청을 했었다.
신청 후 지역 장애인 부모회에서 연락이 왔고 상담을 하러 갔다. 나는 6년 동안 내가 쌍둥이들을 양육해왔고 가족 이외의 사람에겐 아이들을 맡겨본 적이 없어서 불안했었고, 약간의 불신이 있었다. 말을 못하고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아이들이기 때문에 정말 최소한의 돌봄만 부탁드리고 싶었다.
나에게 상담해줬던 직원분은 내가 필요시간을 적게 원하니 “매칭된다면 어머니도 급한 일 있을 때, 나의 휴식이 필요할 때 좋을 거예요~”라고 나를 안심시켜주듯 말을 해줬다.
바로 다음날 지금의 돌봄선생님을 만나게 됐고, 일주일동안 선생님의 차로 하원-센터-픽업을 오가며 아이들의 동선과 스케줄을 익혔다. 아이들은 선생님과의 돌봄을 통해 놀이터에서 친구, 형, 누나들과의 사회성 발달에 자극을 받고, 언어자극이 더 향상되었다.
센터에 있는 선생님들과 원장님들은 나에게 “돌봄선생님이 아이들을 잘 챙겨주신다, 아이들과 유대관계가 잘 형성되어 있다”라고 말을 해주기도 했다.
아이들이 배운 것 중 안전벨트를 하고 가만히 앉아있는 법, 혼자 그네를 탈 수 있게 발을 움직이는 법, 옷을 갈아입는 법, 연필을 쥐고 글씨를 쓰는 법 등 다양한 생활환경에 적응할 수 있게 도움을 주셨다.
대소변 실수가 빈번하고 말보다는 행동이 먼저 나오고 울음과 짜증이 가득했던 아이들이 활짝 웃고 자신의 의사표현을 정확히 표현하면서 양해를 구하고 감사함을 표현할 줄 아는 멋진 어린이가 되었다.
순간순간 하지 못했던 것을 해낸 순간 꾸준히 연습하는 모습 등의 사진과 동영상을 보내주시는데 그 속의 아이들의 표정에서 행복함과 즐거움이 묻어나오는 것을 볼 때마다 잘 챙겨주지 못한 내가 미안할 정도이다.
워킹맘으로써 제일 곤란한 상황인 아이가 갑자기 아플 때, 돌봄선생님이 근무하고있는 나를 배려해 대신 병원에 가서 진료를 보고 아이를 돌봐주셨다. 덕분에 업무에 집중을 하고 자리를 잘 잡게 되어 경제적인 부분도 많이 완화되었다.
선생님이 혼자 아이들은 픽업하기 시작한 후, 걱정과는 달리 나도 아이들도 모두 더 발전된 생활을 하게 되었다. 선생님이 픽업을 해주는 시간 동안 주말로 미뤄왔던 청소를 하고, 여유롭게 장을 보고 반찬을 만들기도 하고, 혼자 영화를 보고, 때로는 커피 한잔을 먹으러 가기도 했다.
내가 휴식을 취한만큼 체력을 아끼다 아이들과 더 재밌게 놀아줄 수 있었고, 마음의 여유가 생기니 남편과의 트러블도 서서히 줄어들었고 새벽까지 잠 못자던 불면증도 많이 해소되었다.
그 시간 속에서 나는 엄마도 아니고 직원도 아닌 '나' 로 있을 수 있는 시간이었다. 하루하루 지치고 포기하고 싶었던 마음만이 가득했었는데 어느새 이 시간을 즐기고 있었다. 몸과 마음가짐이 달라진 건 나뿐만이 아니었고 남편도 전과는 달리 아이들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서 아이들의 눈높이를 맞추면서 아이들을 웃게 하는 아빠가 되었다.
전과는 다르게 아이의 장애를 인정하며 못 했던 대화를 진솔하게 하고, 앞으로의 방향성에 대해 진지한 얘기도 나누었다. 서로의 생각과 관점을 이해하고 100%는 아니더라도 멋진 아빠 엄마의 모습으로 지내자 다짐했다.
우리의 변화된 모습은 친정엄마나 이모 삼춘들, 시어머니까지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분위기가 많이 좋아졌고 다들 흐뭇해하시며 너무 좋은 선생님 만나서 다행이라고 감사한 분이라고 항상 말씀해주셨다.
이러한 생활에 적응을 하자 나에게도 정직원이 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근무시간이 길어지고 근무지도 바뀌면서 퇴근시간도 늦어지는 걱정도 있었지만 내 욕심으로는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다행히 돌봄선생님과 시간 조율이 가능했고 덕분에 정직원 제의를 수락할 수 있었다.
처음 돌봄지원사업을 신청할 때만 해도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내가 이젠 좋은 선생님을 만날 수 있게 되서 너무 감사할 따름이다. 나에게 지원사업의 필요성과 휴식시간 안내를 추천해준 직원분도 지원사업 안의 소속된 선생님도, 이러한 지원사업이 있다는 모든 상황이 감사하다.
앞으로 아이들은 사회로 나아가기엔 멀고 먼 길을 차근차근 걸어나가야 할테지만 마라토너 옆을 지켜주는 페이스메이커처럼 선생님의 돌봄과 연습이라면 점차 발전된 모습을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1등이 아닌 꼴등이라도 완주하는 모습을 볼 수 있게 거북이처럼 느리더라도 선생님과 같이 나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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