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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험의 문턱에서 멈춰 선 장애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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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햇빛촌 조회 2,860회 작성일 26-02-09 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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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블뉴스 김경식 칼럼니스트】“의사능력이 없다”는 이유로, 또는 장애등급이 높다는 이유로 보험 가입 절차가 문 앞에서 멈춘다. 국가인권위원회는 2022년 지적장애인의 의사능력을 이유로 상해보험 가입을 불허한 행위를 차별로 판단하고, 보험사와 금융감독원에 관행 개선을 권고했으며 양측이 이를 수용했다고 밝혔다. 이 사건은 한 개인의 불운이 아니라, 민간보험 시장에서 장애인 소비자가 반복적으로 맞닥뜨리는 구조를 드러낸다.

보험은 위험을 ‘사회적으로’ 분산시키는 장치다. 그런데 그 장치가 특정 시민을 ‘위험 그 자체’로 취급하며 시장 밖으로 밀어낸다면, 그것은 위험관리의 기술이 아니라 차별의 제도화다. 2010년 인권위는 장애등급만을 주요 근거로 보험가입을 거절하거나, 통계·의학 자료 등 객관적 근거 없이 인수기준을 설정하고, “할증 불가” 설계를 통해 특정 장애유형을 원천 배제하는 방식까지 차별로 판단했다. ‘위험’이 아니라 ‘사람’을 배제하는 순간, 보험은 상품을 넘어 인권의 문제로 넘어간다.

특별법을 외면한 채 일반법을 방패로 삼는 모순

현행 「장애인차별금지 및 권리구제 등에 관한 법률」(장애인차별금지법)은 금융상품·서비스 제공자가 보험가입 등에서 “정당한 사유 없이” 장애인을 제한·배제·분리·거부하지 못하도록 명시한다. 그럼에도 현장에서는 여전히 ‘능력’ ‘동의’ ‘위험’ 같은 단어가 장애를 사실상 일괄 배제하는 도구로 작동해 왔다.

문제는 여기서 더 노골적인 모순을 드러낸다. 보험사가 차별금지의 취지를 외면한 채, 「상법」 제732조(‘15세 미만자·심신상실자·심신박약자’ 관련 조항)를 근거로 광범위한 거절 논리를 내세우는 관행이다.

물론 상법 제732조는 2014년 개정으로 “의사능력이 있는 경우” 예외를 두고 있다. 그러나 현실에서 이 예외는 ‘문턱을 낮추는 장치’가 아니라 ‘문턱을 정당화하는 문구’로 악용될 소지가 있다. 같은 법률 위계에서, 장애인차별금지법이라는 차별금지의 특별규범을 제쳐두고 상법의 일반조문을 앞세우는 태도는 더 이상 설득력을 갖기 어렵다.

인권위가 2022년 사건에서 “상해보험은 피보험자 동의가 반드시 필요한 것도 아니다” 등 구체적 법리·약관·위험 특성을 들어 차별을 인정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선진국의 기준: “차별을 하려면, 데이터와 합리성을 내놓아야 한다”

해외 다수 국가는 보험 영역의 차별 문제를 ‘예외 허용’이 아니라 ‘엄격한 조건’으로 다룬다. 예컨대 영국 「Equality Act 2010」은 장애차별 금지 원칙 아래, 보험·연금 등 위험평가가 수반되는 영역의 예외를 두더라도 “actuarial 또는 기타 신뢰할 수 있는 데이터에 근거하고,“모든 사정에서 합리적이어야 한다는 취지를 명확히 한다. 영국 의회 하원 도서관도 보험 분야 예외가 존재하더라도 그 운용이 데이터·정당화 요건과 결부된다는 점을 정리한다.

호주 또한 Australian Human Rights Commission 가이드라인을 통해 보험·슈퍼애뉴에이션에서의 차별이 문제될 때, ‘부당한 부담(unjustifiable hardship)’ 항변과 함께 통계·계리 자료 등 근거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캐나다 온타리오에서는 Ontario Human Rights Commission가 보험에서의 인권 쟁점을 다루며, 위험군 분류와 심사 기준이 과도하게 일반화될 수 있다는 문제의식을 공론화해 왔다.

뉴질랜드 「Human Rights Act 1993」도 장애 등을 이유로 다른 조건을 적용하려면 통계·계리 자료 등 근거에 기반해야 하는 구조를 둔다.

요지는 단순하다. “차별을 하려면, 설명하고 입증하라.” 반대로 말하면, 자료도 없이 ‘그럴 것’이라며 막는 순간 그것은 위험평가가 아니라 편견이다.

한국의 개선: 제도·감독·관행은 분명히 전진했다

그렇다고 한국이 제자리걸음만 한 것은 아니다. 인권위는 2013년 ‘장애인 보험차별 개선 가이드라인’을 발표하며, 인수·유지·보험금 지급 전 단계에서의 차별 유형을 제시하고, “정당한 사유”와 입증책임을 구체화하도록 권고했다.

또한 2014년 금융위원회는 장애등급 등을 근거로 한 보험가입 거절 관행을 개선하고 상법 개정 취지를 반영하도록 하는 취지의 보도자료를 통해 정책 방향을 밝힌 바 있다.

감독·절차 측면의 개선도 있었다. 2018년에는 보험 가입 청약서에서 장애 관련 ‘사전고지’가 폐지되어, 보험 청약 단계에서 장애를 이유로 한 차별 논란을 줄이려는 조치가 시행되었다.

최근에는 금융위 옴부즈만 활동 결과로, 장애인 전용보험 전환특약 신청접수 등 절차를 콜센터 등 자회사에 위탁 가능하게 하는 개선(2025년 7월)이 이뤄졌다는 점이 공식적으로 확인된다.

무엇보다 ‘체감 지표’에서도 변화가 포착된다. 보험연구원 연구보고서(2024)는 2014년 조사에서 전체 장애인의 보험가입 시 차별 경험이 45.4%로 보고된 반면, 2023년 조사에서는 13.9%로 크게 줄었다고 정리한다. 개선은 실제였다.

미비점: “줄었다”는 말로는 남는 차별을 지울 수 없다

그러나 감소는 ‘해결’이 아니다. 첫째, 인권위가 2022년에 동일한 성격의 사건에서 차별을 인정하고 감독기관의 지도·감독 강화를 권고했다는 사실 자체가, 차별이 현재진행형임을 말해준다.

둘째, “정당한 사유”의 기준이 여전히 현장에서 자의적으로 쓰일 위험이 크다. 인권위는 이미 2010년 결정에서 인수기준은 검증된 통계·과학·의학 자료에 기초해야 하며, 장애등급 같은 표지로 일괄 거절해서는 안 된다고 분명히 했다. 그럼에도 ‘자료 없는 거절’은 반복될 수 있었고, 그래서 지금도 제도의 핵심은 근거의 제출과 검증에 있다.

셋째, ‘의사능력’ 프레임은 국제인권 기준과도 충돌한다. 유엔 장애인권리협약은 평등과 비차별을 천명하고, 법 앞의 평등한 인정 및 권리행사의 보장을 강조한다.

우리나라도 2009년 1월 협약이 국내 발효되었다는 정부 설명이 있다. 그럼에도 보험 현장에서 장애인의 의사결정은 ‘지원의 대상’이 아니라 ‘배제의 사유’로 처리되기 쉽다.

2022년 사건에서 인권위가 필요한 인적·물적 서비스 제공 없이 의사능력 부재를 단정한 점을 문제 삼은 대목은, 한국이 가야 할 방향이 ‘거절의 정교화’가 아니라 ‘지원의 제도화’임을 보여준다.

결론: 보험의 문턱을 ‘데이터·투명성·지원’으로 낮춰야 한다

한국은 분명히 전진했다. 그러나 남은 과제는 더 정밀하고 더 근본적이어야 한다.

정당한 사유의 ‘증거 규칙’을 강제해야 한다. 거절·할증·조건부 인수는 ‘내규’가 아니라 객관 자료에 기반해야 하며, 그 요지를 소비자에게 설명할 책임이 따라야 한다. 인권위가 누차 강조해 온 “객관적·합리적 근거” 원칙을 감독규정과 실무 프로세스에 박아 넣어야 한다.

절차적 정의(appeal·재심사·대안 제시)를 제도화해야 한다. ‘거절’이 끝이 아니라, 대체 조건·가입금액 제한·합리적 편의 제공 등 가능한 옵션을 제시하고 이의제기 경로를 명확히 해야 한다.

상법 조문은 차별금지법과 정합적으로 해석·운용돼야 한다. 상법의 문언(심신상실·심신박약 등)이 현실에서 낙인과 일괄 배제의 근거로 오용되지 않도록, 차별금지법 제17조의 취지에 맞춘 감독·해석 지침이 필요하다.

보험은 ‘팔아도 그만’인 상품이 아니다. 특히 장애인에게 보험은 의료비·돌봄·소득 공백이라는 생애 위험에 대응하는 최소한의 사회적 방파제다.

차별을 줄였다는 성과를 인정하되, 그 성과가 남은 차별을 가리는 알리바이가 되어서는 안 된다. 이제 필요한 것은 선언이 아니라, 근거를 요구하고(데이터), 과정을 열어 보이며(투명성), 결정을 돕는(지원) 체계다. 보험의 문턱에서 멈춰 선 시민을 다시 ‘가입자’로 돌려세우는 일, 그것이 한국 금융의 인권 수준을 가늠하는 기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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