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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집에만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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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햇빛촌 조회 3,009회 작성일 26-02-04 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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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단해지기 시작한 나의 삶의 운영은 나를 자유롭게 했다
기자명칼럼니스트 박지주 입력 2026.02.03 17:08

1971년생. 1980년대 말, 방 세 개와 마루 위에 가지를 치듯 이어 붙인 집 구조 속에서 내 방은 문이 네 개였다. 그중 하나의 창문은 벽지로 막혀 문이 세 개가 되었고, 그중 두 개는 문조차 없는 통로 같은 방이었다. 방 밖으로 나가려면 턱을 넘고 수동 휠체어를 타야 했다.

그곳에서 나는 내 청소년기를 보냈다. 언제부터였을까. 어느 순간부터 나는 그냥 ‘집에만 있는 아이’가 되어 있었다.

중학교 2학년, 누군가 집에 와서 사인을 받아 갔다. 그것이 중학교 중퇴라는 사실조차 제대로 듣지 못한 채, 나는 조용히, 아주 자연스럽게 집순이가 되어 갔다. 그 시절 나의 친구는 TV와 책, 음악, 그리고 자연이었다.

동생 셋이 있었지만 그들 역시 각자의 삶으로 바빴고, 나는 원치 않는 자유를 끝없는 시간으로 받아들여야 했다.

아침에 학교에 갈 일도, 돌아올 일도 없는 삶. 어찌 보면 완전히 자유로워 보였지만, 그 자유가 정말 자유인지 의문이 들기 시작하면서 내 안에서 갈증이 일었다.

이 글은 내 과거를 회상하기 위한 글이 아니라, ‘집에만 있게 만드는 조건들’을 하나씩 되짚기 위한 시작이다.

나는 장애 때문에 집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나를 설명해 줄 언어와 정보, 그리고 나아갈 길이 없었기 때문에 집에만 있었다.

“나는 왜 집에만 있는가?”

TV를 보고 책을 읽고 노래를 불러도 채워지지 않는 답답함이 마음을 계속 두드렸다. 그럴 때면 나는 2~3시간씩 목이 터져라 노래를 불렀다. 이선희와 변진섭을 따라 부르고, 때로는 가곡을 부르며 쌓여 있던 답답함을 토해 냈다.

또래와의 교류가 전혀 없이 집 안에만 머무는 삶. 그것이 나를 가장 숨 막히게 했다. 친구가 그리웠고, 꿈을 말하고 싶었고, 어디로든 나가고 싶었다. 하지만 나에게는 어디로 가야 하는지, 어떻게 가야 하는지 알려 주는 사람도, 정보도 없었다.

얼마나 심심했는지, 바닥의 먼지를 한참 들여다보다가 각기 모양이 모두 다르다는 사실에 놀랐던 적도 있다.

쓰레기로 취급되는 먼지도 그렇게 다양한데, 나는 도대체 어떤 존재인가.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정말 없는가.

그 질문은 공허했지만 동시에 나를 깨우는 소리였다. 뭉쳐져 있는 먼지도 하나하나 뜯어보면 그 모양이 다 달랐다. 그냥 더러운 먼지로 퉁쳐지는 먼지를 봐도 다양한 형태를 취하는데, 사람인 나는 그보다는 좀 더 귀하지 않을까. 그냥 퉁쳐지는 방순이는 아니지 않을까. 뭐라도 해 봐야 하지 않을까!

스스로를 들여다보고 주위를 둘러보며 끊임없이 마음의 시동을 걸었다. 움직이는 신호! 이 방 밖을 자유로이 나가고 싶은 욕망은 예열되어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다 문득, 나는 나를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무엇이 문제여서 이렇게 집에만 있는 걸까.

나의 장애가 어디에서 오는지, 정확한 원인도, 내 몸이 어떤 상태인지도 알지 못한 채 그냥 ‘집에 있는 아이’로 살아가는 이 굴레를 벗어나고 싶었다. 살아 있는 존재라면 움직여야 하지 않느냐! 그러려면 나를 알아야 한다는 기름을 내 삶의 차에 붓기 시작했고, 나의 욕망은 시동을 걸어 앞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엄마에게 병원에 데려가 달라고 목적지를 말했다. 나의 몸이 어떤 상태인지 알아야 한다는 신념은 가속되어 품안을 뚫었다. 멈출 수 없는 내 소리는 더 이상 내 안에 가둬져 있지 않았다.

하지만 엄마는 “다 소용없다”는 말만 반복했다. 무엇이 문제인지 설명해 주지 않았고, 나는 내 몸의 상태를 제대로 알고 싶어 더욱 간절해졌다.

그 집념은 결국 단식으로 이어졌다. ‘나를 알아야 한다’는 가열된 집념은 나를 향한 가장 기본적인 존중의 마음이었다. 나를 알아야 내가 나를 어떻게든 해 볼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뜨거워진 내 목소리는 나를 포기할 수 없었다. “병원에 데려다 주지 않으면 난 죽겠다. 굶어 죽겠다.” 내 나이 18살! 그 절박함으로 일주일 동안 단식을 이어 갔다.

무기력한 내 삶을 알아야 움직일 수 있다는 생각은 나를 흔들어 깨웠고, 결국 부모님은 내 의지를 받아들여 서울의 큰 병원으로 나를 데려가 주셨다.

그 시절 제주도의 의료 환경은 열악했다. 그래서 나는 서울을 고집했다. 내 몸의 상태를 정확히 알아야 한다는 고집은, 내가 나를 찾아가는 첫 여정이었다. 세상과 연결된 나의 몸은 나를 실현시키는 도구였다.

이 몸이 왜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지, 앞으로 움직일 수 있는지 없는지. 이 모든 것을 알아야 했다. 그것은 떼쓰기가 아니라, 나를 알고 결정할 권리를 요구한 일이었다.

단식이라는 치열한 투쟁은 내가 나를 버리지 않았다는 증거였다. 그것은 나를 지탱하는 힘이 되었고, ‘스스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몸으로 증명한 사건이었다.

부모님의 “소용없다”는 말에 순응하지 않고, 스스로를 위해 몸부림친 그 시간은 나에게 자부심을 주었고, 뜨거운 희망을 틔웠다.

나는 단식을 통해 스스로 주도하고 만들어 가는 내 힘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 힘이 나에게 말했다. “너는 나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세상으로 나의 몸을 던졌다. 그리고 그때부터 비로소, 나는 나의 장애를 하나씩 알아가기 시작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알기 위해 싸웠고, 그 싸움이 관철되어 스스로를 탐색하고 연구할 수 있는 주도적 힘이 작동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었다.

스스로의 삶을 스스로 굴러가게 하는 작동이 있다는 만족감은 농도 짙은 에너지가 되어, 나의 삶을 누리는 증폭제로 발현되기 시작했다.

태어남은 선택할 수 없었고, 이 부모와 이 형제, 이 친척들, 이 지역에 살아가는 현실 역시 선택할 수 없었다.

그러나 나를 알아가는 출발점, 세상과 연결되는 내 몸의 상태를 알아가는 일만큼은, 내가 선택했다.

그 시작을 내가 강력하게 했다는 성취감은 세상으로 두렵지 않게 나아가게 했다. 단단해지기 시작한 나의 삶의 운영은 나를 자유롭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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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럼니스트 박지주 freeand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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