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퇴근 시간 지하철에서 드러난 이동의 조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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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햇빛촌 조회 3,869회 작성일 26-01-20 09:50본문
【에이블뉴스 김시내 칼럼니스트】얼마 전 연구와 관련한 인터뷰를 마치고, 불가피하게 퇴근 시간대 지하철을 이용하게 되었다. 필자는 전동 휠체어 사용자로, 평소에는 가까운 거리가 아니라면 교통약자 이동차량을 이용하는 편이다. 그러나 그날은 일정과 이동 여건상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AI 이미지 생성. ©김시내
사람이 가장 많이 몰리는 시간대, 휠체어를 탄 채 객차에 오르는 일부터가 쉽지 않았다. 가까스로 휠체어석이 있는 칸에 탑승했지만, 장시간 이동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휠체어석의 위치를 알고 있다는 사실은 큰 의미가 없었다. 그곳으로 이동할 수 있는 동선이 확보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나는 객차 한가운데에 머물게 되었고, 그 자리는 선택의 결과라기보다 그 순간 이동이 허락된 유일한 위치에 가까웠다.
객차 안은 빠듯했다. 서로의 몸이 닿지 않도록 균형을 잡으려 애쓰는 모습이 보였지만, 이미 그 균형은 무색해진 상태였다. 역마다 문이 열릴 때마다 사람들은 더 밀려들었고, 객차 안의 긴장도는 자연스럽게 높아졌다. 그 안에서 휠체어는 더 많은 주의를 요구하는 존재가 되었다. 휠체어가 조금이라도 움직이는 순간, 사람들의 발이 바퀴에 밟힐 수밖에 없는 거리였기 때문이다.
그 순간 가장 먼저 느껴진 것은 불편 그 자체보다 ‘시선’이었다. 바쁘게 오가는 눈길들, 그리고 그중 일부는 숨기지 않는 불편함을 표정으로 드러냈다. 몇몇 어르신들은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왜 정중앙에 서 있느냐”거나, 문이 열릴 때마다 “내리지도 않으면서 왜 문 앞에 서 있느냐”는 말을 툭 던지듯 건넸다. 악의라기보다는, 여유 없는 퇴근길에 쌓인 피로와 긴장이 그대로 묻어나는 반응처럼 느껴졌다.
그 말들 앞에서 서운함이 전혀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일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해가 되기도 했다. 그들 역시 각자의 시간에 쫓기며, 하루를 버텨내기 위해 이 지하철에 몸을 싣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이 공간에서 긴장하며 서 있는 사람이 나 혼자만은 아니었다. 모두가 각자의 방식으로, 각자의 사정 속에서 치열하게 이동하고 있었다.
다만 그 말들 속에는 내가 왜 그 자리에 서 있을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맥락이 빠져 있었다. 휠체어석까지 이어지는 동선은 확보되어 있지 않았고, 휠체어를 돌릴 수 있는 공간도 없었다. 움직이지 않은 것이 아니라, 움직일 수 없는 상태였다. 그럼에도 멈춰 서 있는 모습은 ‘상황’이 아니라 ‘태도’로 해석되었다. 움직일 수 없음은 보이지 않았고, 마치 스스로 그 자리를 택한 것처럼 읽혔다.
마침 같은 칸에 지하철 직원들이 탑승해 있었다. 그들은 승객들에게 양해를 구하며 내가 휠체어석까지 이동할 수 있도록 통로를 만들어 주었다. 이후에도 주변에서 사람들이 무심코 휠체어에 기대지 않도록 자리를 지켜 주었고, 하차 시에는 휠체어를 돌릴 수 있도록 공간을 확보해 주었다. 그 덕분에 지하철을 이용할 때마다 반복하던 “내릴게요”, “죄송하지만 조금만 비켜주세요”라는 말을 하지 않고도 안전하게 이동할 수 있었고, 자연스럽게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그 감사에는 또 다른 감정이 함께 따라왔다. 휠체어석으로 이동하는 순간, 최소 다섯 명 정도의 승객이 자리를 옮겨야 내 휠체어가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나는 그 자리를 ‘되찾은’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자리를 ‘차지한’ 것처럼 느꼈다. 그들 역시 나처럼 퇴근길에 몸을 싣고 하루를 마무리하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미안한 마음이 드는 것은 솔직한 감정이었다.
이 감정은 개인의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이동이 가능해진 방식이 만들어낸 결과였다. 권리로 마련된 공간이 정해진 절차나 안내에 따라 작동하지 않고, 주변의 양보를 통해서만 확보될 때, 이동은 감사와 미안함을 동시에 남기는 경험이 된다. 이때 이동은 권리라기보다, 여러 사람의 조정이 겹쳐서 겨우 성립된 과정으로 인식된다.
이 경험은 누군가를 나누어 보려는 이야기가 아니다. 출퇴근 시간의 지하철은 이미 모두에게 빠듯한 공간이고, 그 안에서 각자는 각자의 방식으로 긴장하며 이동하고 있다. 이 불편은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니었다. 모두가 이미 감당하고 있는 조건 속에서, 이동은 늘 쉽지 않은 과제가 되어 있었다.
다만 그 안에서 차이가 생겼다. 어떤 이동은 별다른 말 없이 지나갔고, 어떤 이동은 설명과 양해를 필요로 했다. 이 차이는 개인의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이동이 어떤 조건에서 허락되었는지에 따라 만들어진 것이었다. 이동이 정해진 절차와 안내 속에서 이루어질 때는 감정으로 남지 않았고, 그렇지 않을 때는 감사와 미안함이 뒤따랐다. 같은 공간, 같은 시간대에서도 이동이 다르게 경험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그래서 그날의 이동은 불편함보다도, 왜 어떤 이동은 말 없이 지나가고 어떤 이동은 늘 설명을 요구하게 되는지를 드러내는 장면으로 남았다. 출퇴근 시간의 지하철이라는 익숙한 공간에서, 이동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조건에 따라 달라지는 경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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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이미지 생성. ©김시내
사람이 가장 많이 몰리는 시간대, 휠체어를 탄 채 객차에 오르는 일부터가 쉽지 않았다. 가까스로 휠체어석이 있는 칸에 탑승했지만, 장시간 이동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휠체어석의 위치를 알고 있다는 사실은 큰 의미가 없었다. 그곳으로 이동할 수 있는 동선이 확보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나는 객차 한가운데에 머물게 되었고, 그 자리는 선택의 결과라기보다 그 순간 이동이 허락된 유일한 위치에 가까웠다.
객차 안은 빠듯했다. 서로의 몸이 닿지 않도록 균형을 잡으려 애쓰는 모습이 보였지만, 이미 그 균형은 무색해진 상태였다. 역마다 문이 열릴 때마다 사람들은 더 밀려들었고, 객차 안의 긴장도는 자연스럽게 높아졌다. 그 안에서 휠체어는 더 많은 주의를 요구하는 존재가 되었다. 휠체어가 조금이라도 움직이는 순간, 사람들의 발이 바퀴에 밟힐 수밖에 없는 거리였기 때문이다.
그 순간 가장 먼저 느껴진 것은 불편 그 자체보다 ‘시선’이었다. 바쁘게 오가는 눈길들, 그리고 그중 일부는 숨기지 않는 불편함을 표정으로 드러냈다. 몇몇 어르신들은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왜 정중앙에 서 있느냐”거나, 문이 열릴 때마다 “내리지도 않으면서 왜 문 앞에 서 있느냐”는 말을 툭 던지듯 건넸다. 악의라기보다는, 여유 없는 퇴근길에 쌓인 피로와 긴장이 그대로 묻어나는 반응처럼 느껴졌다.
그 말들 앞에서 서운함이 전혀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일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해가 되기도 했다. 그들 역시 각자의 시간에 쫓기며, 하루를 버텨내기 위해 이 지하철에 몸을 싣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이 공간에서 긴장하며 서 있는 사람이 나 혼자만은 아니었다. 모두가 각자의 방식으로, 각자의 사정 속에서 치열하게 이동하고 있었다.
다만 그 말들 속에는 내가 왜 그 자리에 서 있을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맥락이 빠져 있었다. 휠체어석까지 이어지는 동선은 확보되어 있지 않았고, 휠체어를 돌릴 수 있는 공간도 없었다. 움직이지 않은 것이 아니라, 움직일 수 없는 상태였다. 그럼에도 멈춰 서 있는 모습은 ‘상황’이 아니라 ‘태도’로 해석되었다. 움직일 수 없음은 보이지 않았고, 마치 스스로 그 자리를 택한 것처럼 읽혔다.
마침 같은 칸에 지하철 직원들이 탑승해 있었다. 그들은 승객들에게 양해를 구하며 내가 휠체어석까지 이동할 수 있도록 통로를 만들어 주었다. 이후에도 주변에서 사람들이 무심코 휠체어에 기대지 않도록 자리를 지켜 주었고, 하차 시에는 휠체어를 돌릴 수 있도록 공간을 확보해 주었다. 그 덕분에 지하철을 이용할 때마다 반복하던 “내릴게요”, “죄송하지만 조금만 비켜주세요”라는 말을 하지 않고도 안전하게 이동할 수 있었고, 자연스럽게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그 감사에는 또 다른 감정이 함께 따라왔다. 휠체어석으로 이동하는 순간, 최소 다섯 명 정도의 승객이 자리를 옮겨야 내 휠체어가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나는 그 자리를 ‘되찾은’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자리를 ‘차지한’ 것처럼 느꼈다. 그들 역시 나처럼 퇴근길에 몸을 싣고 하루를 마무리하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미안한 마음이 드는 것은 솔직한 감정이었다.
이 감정은 개인의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이동이 가능해진 방식이 만들어낸 결과였다. 권리로 마련된 공간이 정해진 절차나 안내에 따라 작동하지 않고, 주변의 양보를 통해서만 확보될 때, 이동은 감사와 미안함을 동시에 남기는 경험이 된다. 이때 이동은 권리라기보다, 여러 사람의 조정이 겹쳐서 겨우 성립된 과정으로 인식된다.
이 경험은 누군가를 나누어 보려는 이야기가 아니다. 출퇴근 시간의 지하철은 이미 모두에게 빠듯한 공간이고, 그 안에서 각자는 각자의 방식으로 긴장하며 이동하고 있다. 이 불편은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니었다. 모두가 이미 감당하고 있는 조건 속에서, 이동은 늘 쉽지 않은 과제가 되어 있었다.
다만 그 안에서 차이가 생겼다. 어떤 이동은 별다른 말 없이 지나갔고, 어떤 이동은 설명과 양해를 필요로 했다. 이 차이는 개인의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이동이 어떤 조건에서 허락되었는지에 따라 만들어진 것이었다. 이동이 정해진 절차와 안내 속에서 이루어질 때는 감정으로 남지 않았고, 그렇지 않을 때는 감사와 미안함이 뒤따랐다. 같은 공간, 같은 시간대에서도 이동이 다르게 경험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그래서 그날의 이동은 불편함보다도, 왜 어떤 이동은 말 없이 지나가고 어떤 이동은 늘 설명을 요구하게 되는지를 드러내는 장면으로 남았다. 출퇴근 시간의 지하철이라는 익숙한 공간에서, 이동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조건에 따라 달라지는 경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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