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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끼리를 만지듯, 아이를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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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햇빛촌 조회 4,366회 작성일 26-01-12 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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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명칼럼니스트 오윤희 입력 2026.01.12 15:36

아이의 언어치료는 2022년 3월, 만 26개월 무렵 시작됐다. 어린이집 선생님의 권유였다. “말이 느린 것 같다”는 말 한마디를 받아들이기까지는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했다.

‘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한다’는 말 대신, 치료실에서 하나씩 배워가는 현실을 마주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코로나19 때문일까, 바쁜 엄마라서 그랬을까. 자책도 하고 울기도 하며 어느새 4년이 흘렀다.

지금 아이는 어린이집 통합반에서 생활하는 7세가 되었다. 지난해에는 감기 한 번 없이 지냈고, 스스로 노래를 부르고 질문도 한다. 여전히 연습이 필요하지만, 아이는 아이의 속도로 자라고 있다. 이제 나는 그 속도를 응원한다.

언어치료를 꾸준히 다니며 아이와 더 오래, 더 가까이 지내다 보니 부족한 점보다 잘하는 점들이 먼저 보이기 시작했다. 말은 느리지만 체력이 좋고, 몸을 쓰는 활동을 좋아했다. 감각통합치료와 심리운동 수업에도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즐거워했다.

아이랑 대한민국 워케이션 프로젝트 지도. ©오윤희
아이랑 대한민국 워케이션 프로젝트 지도. ©오윤희
떠나서 비로소 알게 된 것들

아이만 바라보며 살아온 지난 해, 감각통합 수업을 마무리하면서 새로운 경험을 해보고 싶어졌다. 매일 같은 시간표로 돌아가는 일상이 아니라, 자연 속에서 살아 있는 감각을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 그렇게 아이와 매달 워케이션을 떠나기 시작했다.

2025년 2월 강원도 양양을 시작으로, 12월까지 일 년 동안 아이와 단둘이 전국 15곳을 여행했다. 엄마표 ‘아이와 자연으로 떠나는 감각통합수업’, ‘아이랑 대한민국 워케이션 프로젝트’였다.

아이는 책과 말로만 알던 감각을 온몸으로 경험했다. 갯벌에 들어가 바지락을 캐고, 카누를 타며 노를 저었고, 잠수함을 타고 산호와 해파리를 보았다. 떠나지 않았다면 알지 못했을 경험들이었다.

여행은 고됐지만, 돌아올 때마다 아이는 하나씩 자라 있었다. 어느 숙소를 가든 잠을 잘 자고, 스스로 남자 탈의실을 이용했으며, 포크 대신 젓가락을 쓰기 시작했다. 떠나지 않았다면 끝내 알지 못했을 아이의 모습이었다.

이 프로젝트는 아이의 결핍을 채우기 위한 시간이 아니었다. 오히려 아이 안에 이미 존재하던 충만함을 발견하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우리 둘만의 특별한 기억이 되었다.

'코끼리를 만지면' (2024, 엄정순) 표지. ©우리학교
'코끼리를 만지면' (2024, 엄정순) 표지. ©우리학교
만져서 이해하는 세계

이 경험은 한 권의 그림책을 떠올리게 했다. 『코끼리를 만지면(2024, 엄정순, 우리학교)』이다. 이 책은 2025 대한민국 그림책상 수상작으로, ‘본다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코끼리를 통해 풀어낸다. 작가는 시각장애 학생들과 함께 10년 넘게 ‘코끼리 만지기’ 미술 교육 프로젝트를 이어온 과정을 담았다.

책 속에는 누구나 코끼리라고 말할 수 있지만, 누구도 본 적 없는 코끼리들이 등장한다. 아이들은 상상하고, 직접 코끼리를 만나 만져 보며, 손끝의 감각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표현한다.

작가는 말한다. “창조의 세계는 우리 각자가 가진 어떤 결핍도 무거워하지 않는다.”

이 그림책은 기존의 그림책과는 결이 다르다. 코끼리는 사전적 의미를 벗어나, 제각기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무엇보다 아이들은 태국 치앙마이로 여행을 떠나 실제 코끼리를 만나고 만진다. 그 황홀한 순간들이 아이들의 공감각으로 생생하게 펼쳐진다.

아이와 여행을 떠나지 않았다면 알지 못했을 아이의 모습처럼, 이 책 속 아이들 또한 떠나지 않았다면 끝내 알지 못했을 코끼리를 만난다. 눈으로 보지 않고, 만지며 알게 된 세계다.

각자의 속도로 만나는 세계

어떤 코끼리여도 괜찮다. 눈에 보이지 않아도, 손에 잘 잡히지 않아도 괜찮다. 우리는 저마다 다른 감각으로 세상을 만나고, 다른 방식으로 이해한다. 말이 느린 사람도 있고, 보이지 않는 사람도 있고, 들리기 어려운 사람도 있다. 그 모든 속도와 방향은 존중받아야 한다.

2026년은 붉은 말의 해라고 한다. 말처럼 달리라는 인사가 오가지만, 모두가 달릴 필요는 없다. 어떤 이는 천천히 걷고, 어떤 이는 멈춰 서서 만지며 배운다. 중요한 것은 앞서 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리에서 살아가는 일이다.

올해는 더 많은 아이들이, 그리고 더 많은 어른들이 보려고 애쓰기보다 곁에 머무르기를 선택하길 바란다. 재촉하지 않고, 판단하지 않고, 함께 느껴보는 시간. 그렇게 각자의 감각으로 세상을 살아가며, 저마다의 속도로 자기만의 붉은 말을 만나는 한 해가 되기를 조용히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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