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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리와 공동체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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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햇빛촌 조회 1,407회 작성일 26-03-04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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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블뉴스 김시내 칼럼니스트】 필자는 보편주의를 지향한다고 말해왔다. 여기서 말하는 보편주의는 ‘모두에게 똑같이’ 나누자는 단순한 평등이 아니다. 사회의 기본 조건이 특정 집단의 지위에 따라 달라지지 않아야 한다는 원칙이다.

어떤 신체 조건을 가졌든, 어떤 상황에 놓였든 시민으로서 동일한 삶의 기반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는 구조적 기준이다. 이 점에서 보편주의는 선별주의와 구별된다. 선별주의는 특정 집단을 먼저 구분하고, 그 집단을 대상으로 필요를 판단하며 자격을 부여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장애계 내부의 담론을 들여다보면 흥미로운 긴장이 나타난다. 한편에서는 선별주의의 실패를 비판한다. 장애를 증명해야 하고, 자격을 심사받아야 하며, 필요를 입증해야 하는 구조 자체가 문제라고 지적한다. 이는 충분히 타당한 문제 제기다. 실제로 제도는 ‘누가 필요한가’보다 ‘누가 증명 가능한가’를 중심으로 작동해온 측면이 있다.

그러나 동시에 ‘장애인을 위한 인권적 관점을 내재한 전문가를 더 양성해야 한다’는 요구도 강화된다. 전문성의 필요성을 부정할 수는 없다. 오랜 배제와 차별의 역사 속에서 보호와 전문성은 현실적인 대응 전략이었다. 다만 여기에서 묻지 않을 수 없다. 이 요구는 과연 보편을 확장하는 방향으로 작동하고 있는가?

만약 그 전문성이 특정 집단을 위한 별도의 체계를 강화하는 방식으로만 작동한다면, 우리는 선별주의를 비판하면서 또 다른 선별의 구조를 공고히 하는 결과에 이를 수 있다. 보편주의는 특정 집단을 위한 통로를 늘리는 전략이 아니라, 사회 전체의 기준을 재설정하는 방향을 지향한다. 차이는 집단의 확대가 아니라 기준의 이동에 있다.


AI 생성 이미지 . ©김시내
접근성의 사례는 이를 분명히 보여준다. 경사로는 휠체어 이용자를 위해 설치되지만, 실제로는 유모차를 미는 부모, 무거운 짐을 든 사람, 노화로 계단이 어려운 고령자, 일시적 부상자 모두에게 필요한 구조다.

장애의 경험에서 출발했지만 그 기준이 도시 설계의 기본값으로 이동하는 순간, 그것은 집단 지원이 아니라 사회의 기본 인프라가 된다. 반대로 ‘장애인을 위한’이라는 표현에 머무르면 같은 구조도 선별의 장치처럼 읽힌다. 차이는 시설이 아니라 기준의 위치에 있다.

왜 집단 중심 담론이 강화되는가? 제도 자체가 등급과 유형을 전제로 설계되어 왔기 때문이다. 자원 배분이 비교와 증명을 요구할수록 집단 내부의 결속은 전략이 된다. 한정된 재정과 정치적 관심 속에서 집단의 이름은 협상의 단위가 된다. 그러나 이 전략이 장기적으로 기준을 이동시키지 못한다면, 권리는 집단의 요구로 고착된다. 그리고 고착된 권리는 쉽게 피로의 대상이 된다.

그렇다면 기준을 어떻게 이동시킬 것인가. 첫째, 요구의 언어를 바꿔야 한다. ‘장애인을 위한 지원’이라는 표현에 머무르지 말고, 그것이 사회 설계의 기본 조건임을 분명히 해야 한다. 이동권은 특정 집단의 편의를 보장하는 문제가 아니라, 시민권의 범위를 어디까지 인정할 것인가의 문제다.

활동지원은 개인을 보조하는 제도가 아니라 노동과 돌봄의 균형을 유지하는 사회적 장치다. 접근성 역시 배려의 차원이 아니라 안전과 효율을 결정하는 설계 기준이다. 이렇게 볼 때 핵심은 ‘누구를 도울 것인가’가 아니라 ‘어떤 기준 위에서 사회를 운영할 것인가’라는 질문이다. 요구를 집단의 필요로만 설명하는 순간 그것은 협상의 대상이 되지만, 사회의 기본 기준으로 제시될 때 그것은 합의의 출발점이 된다. 언어를 바꾼다는 것은 표현을 바꾸는 일이 아니라, 기준의 위치를 이동시키는 일이다.

둘째, 전문성의 목표를 재설정해야 한다. ‘장애인을 이해하는 전문가’를 늘리는 데 그칠 것이 아니라, 모든 공공 영역에서 장애의 관점이 기본 판단 기준으로 작동하도록 구조를 바꿔야 한다. 행정은 신청을 관리하는 기술이 아니라 제도가 시민의 삶을 어떻게 제한하는지 성찰하는 능력을 가져야 하며, 교육과 고용은 배려가 아니라 설계로 작동해야 한다. 전문성은 보호의 기술이 아니라 기준을 내재화하는 능력이어야 한다.

셋째, 정책 설계 방식 자체를 점검해야 한다. 최근 논의되는 개인예산제 역시 이 맥락에서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선택권과 자율성을 강화하겠다는 취지는 의미가 있다. 획일적 서비스 제공에서 벗어나 당사자가 예산을 통제하겠다는 발상은 선별적 시혜 구조를 완화하려는 시도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질문은 남는다. 개인예산제가 과연 기준을 이동시키는 제도인가? 아니면 선택과 조정의 부담을 개인에게 이전하는 구조인가?

예산의 통제권이 개인에게 주어진다고 해서 사회의 기본 설계가 자동으로 바뀌는 것은 아니다. 공공 인프라가 충분히 마련되지 않은 상황에서 개인예산은 결국 시장 안에서의 선택권으로 수렴될 가능성이 크다. 접근성과 이동, 돌봄 구조가 기본값으로 보장되지 않은 채 개인이 예산 범위 안에서 필요한 서비스를 조합해야 한다면, 그것은 보편의 확장이 아니라 책임의 분산일 수 있다. 권리가 개인의 협상 능력이나 관리 능력에 따라 달라진다면, 선별은 다른 이름으로 되돌아온다.

이 지점에서 분명히 해야 할 것이 있다. 정부는 ATM기가 아니다. 버튼을 누르면 예산을 인출해 주는 자동 지급 장치가 아니다. 정부의 역할은 개인의 통장에 금액을 분배하는 기능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기본 조건을 설계하는 데 있다. 겉으로는 보편을 말하면서 실제로는 예산을 개인 단위로 쪼개어 책임을 이전한다면 기준은 이동하지 않는다. 권리는 통장에 입금되는 금액이 아니라 사회 구조에 새겨져야 할 원칙이다.

정부를 ATM기처럼 기능하게 만드는 순간 권리는 ‘인출 가능한 몫’으로 축소된다. 그러나 정부의 책무는 몫을 나누는 데 있지 않다. 이동권은 교통망의 구조에서, 접근성은 도시 설계의 기본값에서, 활동지원은 노동과 돌봄 체계 속에서 안정적으로 보장되어야 한다. 기준이 먼저 확립되지 않으면 개인화된 예산은 보편을 가장한 선택의 부담으로 남는다.

이 과정에서 당사자의 책임 있는 태도도 중요하다. 이는 권리를 낮추라는 말이 아니다. 권리를 안정적으로 확장하기 위한 조건이다. 권리는 시혜가 아니지만 동시에 혼자서 작동하지도 않는다. 재정과 제도, 공동체의 합의 위에서 유지된다. 그 구조를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활동지원이 왜 노동시장과 연결되어 있는지, 접근성이 왜 도시의 안전과 직결되는지 말할 수 있을 때 권리는 고립되지 않는다.

여기에서 말하는 감사의 마음은 굴종이 아니다. 연결에 대한 인식이다. 내가 누리는 권리가 공동체의 자원과 신뢰 위에서 유지된다는 사실을 아는 태도다. 그 감각이 있을 때 권리는 방어적 요구에 머무르지 않고 공동의 기준으로 확장된다.

정당성은 이미 확보되어 있다. 그러나 보편주의는 정당성의 문제가 아니라 기준의 문제다. 기준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권리는 집단의 요구로 남을 수도 있고, 사회의 기본값이 될 수도 있다. 집단의 이름으로만 요구되는 권리는 선별의 틀 안에 머무르지만, 사회의 설계 원리로 확장될 때 비로소 보편이 된다.

권리와 공동체는 대립하는 개념이 아니다. 권리가 공동체의 기본 조건으로 자리 잡을 때 공동체는 더 안정되고 지속 가능해진다. 지금 필요한 것은 더 큰 목소리가 아니라 기준의 이동이다. 권리를 집단의 몫으로 남겨둘 것인가, 아니면 사회의 기본값으로 끌어올릴 것인가. 그 선택은 정책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어떤 사회를 기본값으로 설정할 것인가의 문제다.

그리고 지금 우리의 언어는 그 기준을 과연 어디에 두고 있는가?  우리가 보편이라고 말하는 것들이 또 다른 선별의 결론으로 남아 있지는 않은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그것이 특정 집단의 권리를 주장하는 언어에 머무르고 있는지, 아니면 공동체 전체의 설계 원리로 확장되고 있는지 자문해야 한다. 보편을 말한다면, 그 보편이 누구를 포함하고 누구를 다시 경계 밖에 두고 있는지까지 묻는 태도가 필요하다.

우리가 지키려는 권리가 집단의 울타리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작동하고 있는지, 아니면 공동체의 기준을 넓히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는지, 이제는 스스로 점검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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