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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살롱

수기 [김가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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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햇빛촌 조회 1,018회 작성일 20-12-10 1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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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각사각.. 미니장승 깎는 소리이다.
 ​나무조각이란 것은 깍아낼수록...
​자신을 덜어낼수록 그 형태를 드러내며 조각품으로써의 가치를 지니게 된다.
인생이란 조각과도 같아서 10대 20대는 거친 끌질을 하듯이 방황하고 어떤 모습이 나올지 알 수 없는 투박한 모습을 띄게 되며,
30대 40대는 거친 초벌 끌질을 마치고 조각도를 정성스레 갈아 섬세한 마무리 조각으로 넘어가게 되는 시기이다.
50대 60대는 다 완성된 형태를 사포로 곱게 다듬고 마무리칠을 하여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는 단계이고,
70대 80대는 다 완성된 작품을 가지고 주위에 평가를 받는다고 생각한다.
요새는 평균수명 100세를 바라보는 시대이니 90대 100대는 그 조각품을 세상에 다시 환원하고
자신이 왔던 곳으로 돌아가기 위해 준비하는 단계일 것이다.
하루 한순간이 명품을 만들 것인지 불량품을 만들 것인지 좌우하니 순간순간 자신의 삶에 있어 정성을 다해야 할 것이다.

 나란 사람 장승공예가 김가윤은 어떻게 자신의 삶을 조각해왔는지 한번 그 작업일지를 같이 돌아보고자 한다.

 나는 문예창작학과 1학년생으로 전혜린과 니체를 사랑하고 헤비메탈음악을 즐기는 명랑쾌활한 여대생이었다.
그 당시 아르바이트도 3개나 하고 연극동아리에 가입하여 내 인생을 연극무대에 불사르고져 꿈과 열정으로 똘똘 뭉쳐있었다.
그러던 1992년 학교 방학중 연극동아리모임으로 주 연습장소인 옥상 난간에 걸터앉아 깔깔대고 박수치고 웃다가
6층에서 뒤로 발라당 낙상하여 경추,흉추,요추등 척추 세군데가 부러지고 온몸의 뼈란 뼈는 다 망가지는 대사고를 당하게 되었다.
성격이 워낙에 낙천적이라 막 떨어지고 나서도 다친 것이 실감나지않고 살아있다는 자체가 마냥 신기하여 웃다가 일어나서 집에 가야지 했는데..
몸이 꼼짝도 하지 않아 뭔가 문제가 생긴 것을 감지했다.
이어 친구들이 달려오고 수위아저씨가 달려와 나를 업고 근처 한양대학병원으로 옮기게 되었으며
운반되는 과정에서 척수손상이 더 생기게 되었다.
처음에는 목부분도 다쳐 한달간 손을 쓸 수 없었는데 다행히 경추는 부분손상만 되어
손과 팔에는 감각이 돌아왔고 흉추쪽 척추뼈들은 완전히 가루처럼 바스라져서 그 뼈들이 붙기를 기다리며 꼬빡 1년을 누워지내야만 했다.
사람이 얼마나 단순하고 둔한지..겨드랑이밑으로 감각이 없어 대소변을 가릴 수 없고 일어나 앉을 수도 없는 상황이었지만...
그냥 누워만 있으면 예전처럼 정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 줄 알고 의사의 지시대로 꼼짝도 안하고 누워만 지냈다.
미련한 것이 정신건강에는 좋다는 생각을 가끔 한다.
그러나 1년이 지나 척추수술을 하고 퇴원을 해야 할 때 담당의사선생님이 마치 밥 먹었니 하는 식의 담담한 어조로
우리아빠에게 “이 아이는 평생 누워서 똥오줌 받아내야합니다. ” 했다.
우리 아빠는 그 자리에서 닭똥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셨고 나를 비롯 내주변 사람들은 하늘이 노래졌다.
 
 99%의 절망감속에 퇴원해 장애 수용여부를 놓고 내 자신과 지겹게 싸웠다.
자살을 시도할 만큼 치열히(치열한건가? 미련한건가?) 그렇게 1년을 보내다
우연히 신촌 세브란스병원에 가게 되었고 거기서 나와 같은 척수장애인 정진완씨와 이은희씨를 만나고
그들의 생기있는 모습, 생의 의지, 활력 등에 많은 힘을 얻어 나 자신을 추스렸고,
또 병원 담당박사의 얄밉도록 사실인 그 말을 뒤집기 위해 죽어라 심신의 치료를 꾀하려는데
(중간 중간에 욕창, 방광염, 재수술의 시간도 있었다.)
아..이눔의 합병증들은 왜이리 나를 좋아하는지... 5년가량을 이 병원, 저 병원을 들락거리며 살았다.

 그러다 수술 후 재활치료를 위해 삼육재활병원에 갔다가 종을 한번 만들어 봤으면 하는 생각에
귀금속 가공과에 들어가서 종도 몇 개 만들어봤다.
귀금속세공은 나와 맞지 않았지만 종을 만들때 심신의 모든 괴로움을 다 잊을 수 있었으며,
땀을 뻘뻘 흘리며 일주일간 망치질하여 나온 종에서 맑은 소리가 날 때 그 감동이란..이루 말할 수 없었다.
아무것도 못할 것 같던 내가 무언가를 해낸 그 기쁨..무언가 몰입해서 만들때 심신의 괴로움을 잊게 되는거..
그런 거에 대한 매력에 빠져 만들기에 접어들게 된 것이다.
그 무렵 생긴 욕창으로 인해 병원이냐, 집이냐, 일산훈련원이냐를 놓고 그 갈림길에서 숱한 고민 끝에
일산직업훈련학교로 바퀴를 돌려 목공예과로 들어가게 되었다.
 
 여기서부터 나의 자립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병원에서 퇴원하여 집에 있을때 장애인편의시설이 갖추어지지 않은 온돌구조의 집이어서
화장실은 물론 세면,식사등등 하나부터 열까지 가족들이 나를 챙겨주고 다 해주었는데
장애인직업학교의 생활을 거쳐 혼자 생활하기가 가능했던 것이다.
너무 젊은 꽃다운 나이에 장애를 입어 그 현실을 인정하기 어려웠고
그로 인해 방탕한 생활 (술,담배)도 했었었는데 일산직업훈련원과의 만남으로 인해 나는 새로운 제2의 삶을 되찾게 되었다.
다소 스파르타식 운영체제로 새벽 6시부터 일과를 시작하는 그곳에서 저녁 7시까지 기술, 공부, 생활을 배우고
저녁엔 양호실 또는 기숙사에서 6달동안 욕창치료를 하며 지낸 덕에 전국장애인 기능경진대회에 출전해 목공예로 2등을 먹게 되었다.
삼육재활원에서 취득한 귀금속가공기사 자격증에 이어 일산직업훈련원에서는
목공예기사2급자격증, 칠기기능사자격증, 운전면허증까지 3개의 자격증을 취득하게 되었고
중간에 KBS장애인 드라마에도 잠깐 출연하고, 라디오, 잡지 인터뷰도 하는 등 매스컴도 타보게 되었다.
더구나 직업도 없는 백수가 500만원 가량의 돈도 모을 수 있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목공예과는 학생수 20여명이 훌쩍 넘었는데 다 남학생이었고 여학생은 나혼자뿐이었다.
그러니..무엇을 해도 학과선생님들께서 잘한다잘한다 칭찬을 해주셨고 적극적으로 지원을 해주셔서 그에 자신감을 얻고 더 열심히 하게 되었던거 같다.
 
 훈련원 졸업 후에도 선생님들께서 고려목각이라는 곳에 취업을 시켜주셔서
부모님께서 마련해 주신 차를 타고 출, 퇴근도 하고, 여행도 다니며 무척 활동적으로 생활했었다.
그러나 척수를 다친 중도장애인들에게 늘 따라다니는 합병증으로 인해 병원 신세지는 시간들이 자주 찾아왔고
욕창이나 방광염으로 열이 나고 꼼짝없이 누워만 지내야할 때가 많았다.
그러나 다치기 전에도, 막 다쳐서도, 절망속에서도, 재활치료기간, 교육기간 중에도 단 한순간도 꿈을 꾸지 않은 적은 없다.
꿈을 무척 많이 꾸며 지냈다. 물론 자면서도 억수로 꾸지만 깨어 있을 때도 꿈꾸느라 정신이 없다.
그러나 정말..꿈은 꿔볼만하다..나는 그 꿈을 거의 실현시킨 것이다.
자..그 소박했던 꿈을 들여다보자
<방송통신대 국어국문학과 공부계획, 목공예(탈조각, 기타 소품), 시쓰기, 아크릴 물감으로 옷에다 그림 그리기, 책읽기, 음악 다양하게 듣기,
스포츠(양궁이나 사격배우기), 여행, 돈 왕창벌기, 펜팔친구 사귀기, 마인드 컨트롤, 보조기 신고 2시간까지 운동해 보기, 일기 매일 쓰기, 매사에 감사하기 등등>
꿈의 씨앗들은 끝이 없다.
나쁘게 말하면 욕망, 욕심이고, 좋게 말하면 의욕, 희망이다.
걸어 다니는 사람이면 누구나 이 복잡한 세상을 벗어나 날고 싶은 꿈을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우리 척추파들은 그런 피상적인 꿈 말고도 당장 일어나 걸었으면 하는 명확하고 현실적인 꿈이 있으니 꿈이 없는 삭막한 사람들보다 얼마나 좋으랴.

 나도 언젠가 단군신화의 웅녀처럼 심신을 정화하고 쑥, 마늘은 아니더라도 혼신의 노력, 극기와 염원을 통해 일어서게 될 날을 준비하고 있다.
이기적이고 폐쇄적인 마음, 잘난 척 하고 불신하는 마음, 거기다 아직 성깔도 더럽다.
겉만 멀쩡한 인간이면 뭐하랴. 앉아 있으니 어쩔 수 없이 많은 걸 올려다보지만 아직 마음은 그런 낮은 겸허의 자세가 안 되어 있다.
더 인간이 되어야 한다. 이야, 아무리 써도 꿈은 끝이 없다. 꿈만 꾸다 세월 다 보내는 거 아냐? 아니 뭐 또 그렇게 보내면 좀 어때.
이 넓은 세상 현실주의자가 있어 나 같은 몽상가가 있고, 장애인이 있어 비장애인이 있고, 미운 이가 있어 예쁜 사람이 있고, 악이 있어 선이 있는 게 아니겠어.
그런 다양함이 세상을 이루고 유지시켜 나간다고 생각한다.

 나의 거친 끌질 장애초창기 시절이 이렇게 끝나가고 있었다.

 꿈은 품고 노력하면 다 이루어진다고 했던가.. 나의 꿈들은 현실에서 하나하나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우선 방송대 입학도 하고 정립회관에 양궁도 배우러 다니고 다시 오금리로 하회탈을 깎으러 출퇴근을 시작했고,
여행도 다니며 전시회구경과 많은 사람들을 사귀고 빨빨거리며 싸다녔다. 그런데 누워있을 때 철분제를 많이 먹은 탓일까?
나는 철이 들었다. 해서 내 현 상황이 정확하게 나의 양심카메라에 잡힌 것이다.
늦게 자손을 보아 춘추가 엄청난 부모님과 서른이 넘도록 출가를 안하는 약간 왠수같은 언니, 오빠에...98년 IMF한파로 무척 곤란해진 집안 형편.
가장 결정적으로 집안경제를 힘들게 한건 나의 5년간에 걸친 병원비때문이기도 했다. 방학중이라 학교에서 전혀 보상금을 지급하지 않은 것이다.
그 치료비와 병원비를 부모님께서 다 해결하자니 가세가 기울게 된 것이고 가족 서로 서로가 상처 주는 일들이 많아졌다.
카메라속의 나는 늘 (과거,현재,미래) 주위 사람들에게 걱정을 안겨주는 존재외에 아무 것도 아니었다.
나를 찾고 싶어졌다. 바퀴벌레가 쑥 지나가듯 자립, 출가, 자아발견, 이 세 단어가 나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나는 거의 돈키호테형이다.
일단 뭔가 떠오르면 저지르지 않고는 스스로 견디질 못한다.
그 생각이 떠오른 이후 주변에 벌려 놓았던 모든 일들이 다 시시하고 중요치 않게 여겨졌다.
모든 걸 내팽개친 채 나는 출가를 위해 궁리하기 시작했고 그 길을 모색하던 중 병원에 계신 아저씨 소개로 만난
이천 장애아동 보호시설 원장님을 떠올리게 되었다.
다시 시설에 들어간다는 건 치욕스런 일이고 그렇다고 방을 얻기엔 돈이 한 푼도 없었다.
차에 까스통 장착하는데 백오십만원 들어가고 몇 번 박아 찌그러진 것 펴다 보니 모아 놓은 돈은 다 쓰고 통장엔 2만원이 나를 약 올리듯 들어 있었다.
부모님으로부터 원조를 하나도 안 받고 지낼 수 있는 곳은 어디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천밖에 없었고 난 거의 총알같이 그곳을 찾아가 원장님을 뵙고 내 사정이야기를 하고 부탁을 드렸더니, 의외로 흔쾌히 승낙해 주셨다.

 “봐라 봐. 뭐든 움직이고 시도하면 이 세상 안 되는 게 뭐가 있나.
으~ 난 또 새로운 인생을 살끼다.”

 아.... 이곳은 그야말로 낙원 그 자체였다.
후원이 많아 음식, 물건, 봉사자들이 넘쳐 났고, 휠체어가 나 혼자라 다른 애들은 다섯 명씩 방을 쓰는 데 나 혼자 독방에, 침대에 탁자까지 쓰게 되었고
창고에 내 작업실도 꾸며 주셔서 일도 할 수 있게 되었다.
세 낀 다 차려져 나오지 청소, 설거지도 다른 애들이 다 하고 그야말로 공주 같은 생활이었다.
그러나 그런 것도 잠시.. 세 달쯤 지나자 이곳에서 영양가 있는 음식을 너무 먹은 탓인지 영양가 있는 생각들이 들기 시작했다.
이 곳 애들은 정신지체, 다운증후군, 뇌성마비들로 총17명이었는데 다 문맹이었다. 보살핌과 사랑이 필요한 아이들... 그 아이들이 내 마음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 아이들에게 글과 숫자를 가르치겠다는 야무진 생각을 가지고 애들한테 접근했는데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어떤 글에 적은 적이 있는데 난 성질이 좀 더럽다.
도대체 입력도 메모리도 출력도 그 아이들에겐 불가능했다. 내 능력으론 도저히 안 되었다.
그래도 틈나는 대로 손톱, 발톱도 깎아 주고 하모니카도 불러주고 노래도 하고 주말엔 반찬도 같이 만들었는데 그래도 조화가 잘 되지 않았다. 너무 튀었다고나 할까?
나 혼자 방 쓰는 것, 커피 마시는 것, 샤워하는 것, 티비 안보는 것, 외출하는 것... 일하는 것, 밥 혼자 먹는 것, 전화 쓰는 것 등등..
그런 생활이 이어지다 보니 서울에서 맡아온 내 일을 다 할 수 없었고 왠지 내가 정체되어 있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되었다.
그 애들과 같이 시간을 보낼수록 일, 취미, 여행을 포기해야 했고 그것들은 나를 의기소침하게 만들었다.
내가 바라던 삶은 이게 아닌데 하는 생각들이 날파리들처럼 들러붙었다.

 내 삶은 순간순간 꽉 차 있고 모든 일에 점핑을 시도하고 모험과 불안정한 인생의 파도타기가 아니었던가.

 용기가 필요했다.
그곳에서의 생활은 물질적인 면에서 보자면 내 생애 최고의 장소였기 때문에 그곳을 박차고 나온다는 건 내겐 큰 용기가 필요했다.
안일한 굴복보다 분투하다 쓰러지리라. 나는 완벽한 자립을 꿈꾸었다. 그리고 그 꿈을 실현시키기로 결정을 내렸다.
나는 또 미친 듯이 싸다니기 시작했고 그 동안 일해서 모아둔 돈이 2백50만원밖에 안되어 그 돈으로 무얼 하려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여기저기 융자도 알아보고 벼룩시장을 매일 탐독하며 직접 시골 빈집, 빈터를 알아보러 다녔으나 마땅한 곳이 없었다. 그래서 최종적으로 정한 것이 깡통이였다.
즉, 컨테이너박스, 그것도 장애인의 실정에 맞게 내부시설을 꾸며 주문 제작하려니 그 값이 3백만원이나 했다. 컨테이너박스 자체 값은 1백50만원 정도인데 주문 제작이라 비싸다.
일주일을 컨테이너박스 과장, 상무, 사장을 쫓아 다녔다. 그리하여 깍고 깍아 1백 70만원에 그 물건을 건질 수 있었다.
이야! 정말 수완 하나 끝내주지 않나. 그런데 그것만 달랑 산다고 일이 끝나는 건 아니었다.
전기도 끌어 와야 했고 놓을 장소와 정화조 설치, 수도 배관의 일들이 남아 있었다.

 그러던 차에 장소를 탐색하던 중 그룹홈의 다섯명의 장애인이 모여 사는 집 앞 마당터가 넓다고 하여
그곳으로 가서 소위 구라를 늘어놓아 월세식으로 전기, 수도세를 내기로 하고 그 곳에 깡통을 놓게 되었고 공사를 시작했다.
그런데 또 하루 일꾼 사는데 그 일당이 10만원이나 한다고 한다. 월메나 물가가 비싼지.
도처에 아는 인간들이란 인간들은 다 불러모아 공사를 시작했는데 아마츄어급 일일 노동자라 시간이 많이 걸렸으나 무척 좋은 시간들이었다.
나는 공사기간 중 틈틈이 서울로 가 세면대, 변기 등 싼 것을 찾아 을지로를 헤매고,
보일러를 설치하는데 80만원이 든다고 하여 포기하고 대신 전기난로, 장판, 순간온수기로 지내기로 하고
청계천 중고시장을 굴러다니며 물건들을 구입했다.
비슷한 외모 탓이었을까 혼자 다녀서일까 부랑자들에게 붙잡혀 갈 뻔도 했다.
아직도 등골이 오싹하다.
탁자, 옷장, 싱크대 등은 중고 알뜰 매장에서 싼 가격에 사고 모든 것을 부모님 도움 없이 혼자 해결하려니
너무도 힘들고 순간순간 좌절도 되고 해서 소금물도 흘렸지만 나는 꼭 해내고야 말리라 다짐하며 이를 악물고 하나하나 난관의 벽을 부수었다.
자립한다고 방 얻어달라고 했을때 부모님께서 그 몸으로 나가 어찌 사냐고 완강하게 반대하셨기에
이천시설로 올때 수중에 단돈 2만원밖에 없었지만 그 당시 차도 있겠다. 기술도 익혔겠다.
세상에 무서울 게 없었기에 친구네 잠깐 다녀온다고 해놓고 그길로 안 들어가 버린 것이다.
혹시나 실종신고 할까봐 틈틈이 전화만 하고 툭 끊고..가족이 그리웠지만 이것만이 내가 살길이라 생각해 그 시간을 견뎌나갔다.

 잡다한 생활용품까지 다 장만하고 나니 에누리없이 250만원이 들어갔다.
한달에 3만원정도로 생활했던 시절이니 라면도 고급음식이었다.
하나를 다 먹기에는 아까와 반으로 쪼개서 넣고 라면스프 반 타고 소금을 더 넣어 물을 잔뜩 넣고 라면을 팅팅 불려서 먹은 적도 많았다.
일단 맛을 떠나 배를 채워야하는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식비가 부족해 두유와 강냉이,양배추로 두 달간 연명할 때도 있었지만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에,
내가 장만한 공간이 있다는 것에 행복해서 헛배가 부르던 시절이었다.
추운 겨울밤이면 컵안에 물이 얼고 잠바를 껴입어도 잠이 안와 술을 한잔 마셔야만 그 술기운에 잠에 빠질 수 있었다.
나중에 돈을 모아 보일러를 설치했지만 매년 겨울이면 보일러와 수도호스가 얼어붙곤 했다.
그러면 주인집에서 양동이에 물 한바께스 받아 그걸로 일주일간 생활한 적도 자주 있었다. 특전단이 따로 없지 않은가..
사람은 어떻게든 살게 마련이다. 본인이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쟁반깎기,찻잔받침,하회탈,부네탈, 알깎기등 몇백원씩 하는 하청일을 받아 빡세게 일해서
물건 만들 때 사용할 실톱기계와 드릴기계들도 장만했고 저금도 약간 할 정도로 여유가 생겼다.
하지만 이천의 아동보호시설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나오게 된 것에 대해,
이타적인 삶을 살지 못하고 나 자신만을 위한 삶을 선택한 것에 대해 마음이 아파 한동안 방황했었다.
자기 합리화식의 자위를 하자면 누구나 다 이타적인 삶을 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사람은 누구나 타고난 덕성에 맞추어 주어진 역할과 처지가 있는 것이라고. 그래도 보라.
늘 걱정덩어리, 천덕꾸러기, 말썽꾸러기 김가윤이 실업자 많은 IMF시대에 떳떳이 자립하여 잘 살고 있는 것을... 나의 진정한 자립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이때 깡통에다가 처음으로 뭐 만들까 공방이란 이름을 지어주었다.
공방이름의 뜻은 별달리 없다. 그저 그 시절 아침에 눈 뜨면 오늘은 조각칼로 뭐 만들까 궁리하다가 우연찮게 지어진 것이니까.
나는 무언가 만드는 그 순간을 사랑한다. 돈을 왕창 벌고 싶지도, 유명해지고 싶지도 않다.
이 순간 이렇게 몰입해 일할 수 있는 것이 좋고 많이 행복하다. 꿈꾸느라고 정신없는 나를 나의 든든한 백그라운드 이신 하느님이 툭 건드리며 깨우신다.
'내 딸아.. 내 아들도 목수의 집에서 자랐다. 내가 팍팍 밀어 줄테니 힘내라.' 안정적인 하청일로 인해 상황은 나아져갔고
나는 깡통을 들고 일산으로 다시 이사해 들어오게 되었다.
보통 매스컴이나 20세기 재활 패러다임안에서는 개인의 영웅화나 성공사례가 부각되어져 왔으나 이젠 21세기이다.
있는 그대로의 장애인들이 평범한 보통 사람들처럼 사는 것이 가장 중요한 우리가 추구해야 될 바라고 생각되어 그런 삶을 살고자 노력했다.
자립생활은 자기 자신의 작품이다.
자신을 드러내 보이는 일이다.
진정한 한 인간으로써의 자기 정체감을 찾는 일이다.

 그 당시에는 쟁이와 더불어 도인이 되고 싶었다.
상식개념을 벗어나 그냥 길 위에 서있는 사람.
길을 가는 과정을 즐기는 사람.
모든 것이 결과물로 평가되는 이 시대엔 걸맞지 않는 소리다.
그러나 그 개개인의 평가는 학력이나 능력, 직업, 부에 의해 내려져서는 안 된다고 본다.
그 인간 생명자체로 그 존재가 평가되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이유로 장애인들은 아름답다. 그 눈물겨운 자기투쟁과 극복, 개척...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사건은 벌어지고 그것을 해석하는 건 우리 몫이다.
나는 시지프스다.
기껏 올라왔는데, 또 밑으로 떨어져 올려야 한다.
이 불공평한 개떡같은 내 인생 할 것인가.
아니면 나는 비록 또 떨어졌지만 봐라 아무리 시련을 준다고 해도 다시 바위를 밀어 올리는 내가 있다.
이렇게 극복해내는 강한 나 자신이 있다고 소리칠 것인가. 나는 누구보다도 내 자신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장애를 가지고도 이렇게 행복하게 아름답게 멋있게 살 수 있다는 것을...
내 장애가 내 다양하고 풍요로운 멋진 삶의 오작교가 되어주길 바랬다.

 자~ 이제 나의 거친 끌질이 끝나고 드디어 조각칼을 잘 갈아 섬세하게 마무리조각에 들어가는 시기가 찾아왔다.

 너무 잡다한 많은 일들을 해서일까?
등에 박아놓은 쇠가 튕그러져 몸밖으로 나와 진물이 흐르는 관계로
어쩔 수 없이 다시 병원에 입원해야 했다.
겨드랑이선부터 바로 항문위에까지 긴 쇠들을 박아 몸의 굴신이 더 어렵게 되었으나
척추가 너무 틀어지고 마비 레벨이 높다하여 다른 수술방법이 없었다. 앉은 키가 더 커진 듯했다.
그게 3번째 수술이었는데 체력이 약해져서인지 수술후 1주일만에 마취에서 깨어나게 되었다.
띵띵 부은 얼굴로 거울을 보며 다짐했다.
원치않아도 이렇게 육체가 감옥이 될 때가 찾아온다.
그러니 움직일 수 있게 되면 정말 내 온몸을 다 바쳐 하고 싶은 것은 다 하고 살리라.
나 자신을 완전히 불사르리라..엎드려 몇 달 지내다가 집에서 요양하라는 엄마의 요청을 뿌리치고 일산의 깡통으로 돌아왔다.
내 공간, 내가 마련한 사랑스러운 나의 보금자리 진짜 볼품없고 좁고 춥고 덥고 악조건을 고스란히 지니고 있지만
언제나 김가윤에게 자부심을 불러다주는 내 힘으로 마련한 내 공간. 나는 그 공간을 너무나 사랑했다.

 한 며칠 집정리하고 보일러 터진 것 등을 손보고 지내는데 일산직업전문학교 선생님께 연락이 왔다.
전국기능대회때 나를 본 업체사장님이 나를 한번 만나보고 싶다는 것과 아주 단가가 좋은 물건이 있는데 경주에 내려와
그 업체의 물건을 배워 하청일을 한번 해보지 않겠냐는 그런 내용을 담은 것이었다.
용기를 내어 전재산을 챙겨가지고 경주로 내려갔다.
경주 생활은 새롭고 힘찼으며 신선하고 매력적이었다.
무언가 새로 배운다는 것은 참 신나는 일이다.
진짜 빡시게 살았다.
새벽 4시에 일어나 아침 준비하고 공부하고 7시에 출근하여 기술 익히고 6시에 퇴근하여 저녁하고 빨래 집정리하고 장보고..
그렇게 치열하게 그곳에서 몇 달을 지내다 다시 올라왔다.
그러나 업체 사장님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자꾸 나를 그 곳 경주에 묶어두려 하셨다.
하청일은 얼마 안가 끝이 났다.
몸도 안 좋은 상태에서 무리해서 내려가 내 에너지를 쏟아 붓고 가지고 있는 돈도 거의 다 투자하여
그 일에 매달려 기대에 부풀었는데 일이 자꾸 꼬여만 갔다.
실망감과 인간에 대한 배신감, 좌절감에 나는 깊은 나락으로 떨어졌다.
이제 돈도 다 떨어지고 컨테이너박스에서 찜질방보다 뜨거운 여름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시 하청일을 찾아보기는 싫었다.
아니 그 후에도 나는 몇 군데를 더 알아보고 시도하고 다녔던 것 같다.
그러나 단가가 거의 10원대에서 100원대짜리밖에 없었고 장애도 있는데다가 여자라서 못 미더워하고 일을 주기 꺼려하는 곳이 많았다.
그 자리에서 깎아보라는 사람도 있고 칼을 다룰 줄은 아냐고 묻는 사람도 있고 다른 직업을 구하라는 사람들,
주변의 식구들, 친구들까지도 이번 기회에 다른 일로 업종전환을 하라고 부추겼다.
마음이 너무 괴롭고 허전했으며 그 어느 누구 하나 나를 이해해주고 위안을 주는 사람은 없었다.
철저히 나는 혼자였다.
내가 땅을 짚고 일어설 수밖에 없었다. 

 코엑스에서 대한민국 공예대전이 열린다는 소식을 접해 나와 같이 무언가 만드는 사람들의 숨결을 느껴보고
그 곳에서 위안을 받고져 무작정 구경을 갔다. 참 좋은 물건들이 많이 있었다.
쪽동백으로 만든 미니장승.
 
 나는 그곳에서 나의 사부님을 만났다.
껍데기를 살린 까만 조그만 나무에 새겨진 미니 장승들.
온 몸에 전율이 돋는 느낌을 받았다.
'어... 이거다. 내가 찾던 물건 '
한참을 서서 구경하고 핸드폰걸이, 열쇠고리 등으로 만들어진 그 작은 장승들을 만지고 또 만졌다.
체험해 볼 수 있는 공간이 있었다.
그 곳으로 가서 칼들을 구경하고 있으니 저만치에 나의 사부님께서 걸어오시는 모습이 보였다.
키가 아주 크고 긴 머리에 긴 수염 예수님을 닮아 보이는 맑고 순한 눈빛의 사람이었다.
“칼 만져본 적 있어요?”
“아니요” 
“그럼 위험하니까 잘 봐요”
사부님은 쓱쓱쓱 나무를 자르시더니 금새 미니장승을 깎으셨다.
한마디로 나는 딱 뻑이 갔다.
연락처를 건네받고 핸드폰걸이를 하나 샀다.
그랬더니 깎으시던 장승을 잘라 목걸이를 만들어 그냥 주셨다.
집으로 돌아왔으나 그 장승들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돈이 떨어져 공공근로를 시작했다. 그리고 틈틈이 쟁반과 미니장승들을 주목쪼가리 나무들로 깎기 시작했다.
장승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분에게 전화를 했다.
“ 저 장승을 한번 깎아보고 싶어서 그러는데요.
그 나무들을 좀 보내주시면 안될까요? 제가 나무값은 부쳐드릴께요.”
 
 며칠 후 나무가 왔다.
한 박스 가득 보내주셨다.
너무 너무 행복했다.
나무를 한참 끌어안고 쓰다듬고 냄새 맡고 그 생김새들을 관찰했다.
모든 일을 접었다.
공공근로, 하청일, 걱정, 운동, 공부, 그 잡다한 일들을 다 접고 오로지 장승만 깎았다.
보내주신 쪽동백나무는 귀하여 아껴쓰기로 하고 시골 여기저기를 다니며, 톱을 싸가지고 쓰러져 있는 작은 나무들을 수집하여 계속 장승들을 깎았다.
참 행복한 시간들이었고 그렇게 하나하나 장승의 형상을 띄며 나오는 물건들에 스스로 경탄하고 행복해 어쩔 줄 모르던 귀한 시간들이었다.
그렇게 장승 만드는 재미에 푹 빠져 지내던 9월 어느 날에 수레바퀴 척수장애인 문화제가 열린다고 탁용준 화백님이 전화를 주셨다.
“가윤씨 작은 소품이라도 괜찮으니 작품 꼭 좀 내주세요.”
“저는 기술자인데요. 그런 전시회에 낼 작품들은 없는데...”
“괜찮아요. 그냥 여러 사람들에게 장애인들이 이런 저런 다양한 활동을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니깐 부담 갖지 말고.”

 9월 문화제때 여러 장승들을 자연의 소재, 이끼, 조약돌, 식물들을 이용해 디스플레이를 멋지게 하여 전시하였고 아주 좋은 반응을 얻었다.
그 때 코엑스에서 사온 핸드폰걸이 하나를 보고 계속 따라 깎아서 악세사리도 많이 만들어 판매했는데 거의 다 팔리고 돈도 많이 벌게 되었다.
문화제는 끝나고 나는 다시 장승 깎는 일에 빠져들었다.
어느 날 전화가 왔다.
나의 사부님이었다.
“그래 나무 보내준 걸로 조금 깎아봤나요?”
“ 아...예... 선생님! 제가 깎은 것 가지고 한번 찾아뵐께요”
나의 사부님을 찾아갔다.
사부님은 폐교를 얻어 문화학교를 운영하고 계셨고 손님들이 와 계셨다.
문화제때 반응도 좋았겠다.
나름대로 진짜 애쓰고 공들여 만든 장승들을 박스 안에 가득 담고 사부님께 평을 들으려고 방안으로 그 물건들을 옮겨 왔다.
나의 사부님 그 물건들을 진지하게 한참 하나하나 보시더니 하시는 말씀
“이거 땔깜으로 쓰면 딱 좋겠군 ”
띠웅... 그 길로 사부님께 제자로 받아달라고 떼써서 근1년을 일주일에 한두번씩 장승을 배우러 그곳으로 다녔다.
왕복시간이 5~6시간이 걸리고 마비장애인이라 대소변 실수를 하게 되면 어이없이 그곳에 도착했다가 그 길로 바로 나와야 하는 경우들도 있었지만
그 1년은 내게 너무 소중하고 행복한 시간이었다.
사부님은 정말 최선을 다해 나를 지도해주셨고 휠체어 키높이에 맞추어 조각 시연을 해보이시고 매끼 밥을 직접 해 주셨다.
수강료도 못 드리고 신세만 엄청 졌다. 또 계단이 많아 나를 이동시키는 데에도 애를 먹으셨다.
‘복 많이 받으소서 . 사부님! ’
“이 정도면 하산해도 되겠는 걸”
​사부님의 말씀을 듣고 가루니 장승촌으로의 발길이 뜸해졌고 무언가 새로운 것에 도전하고 싶어졌다.
우연히 찾아가 뵌 오금리 유희상아저씨의 작업실에서 국가대표 펜싱선수를 만나게 되었고 그분과 아저씨의 권유로 얼떨결에 펜싱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운동신경 제로인 내가 합숙훈련하며 고생 고생해서 국가대표로 아시안 게임까지 출전했지만 감독님이 아시아랭킹1위 선수와 연습게임을 붙여놔
20대 0으로 무참히 깨지고 선수촌 식당앞에서 장승악세사리를 팔아 금메달값은 벌어가지고 한양으로 향했다.
쓰린 속으로 엄청난 자위를 하며...‘그래 난 천성이 넘 착해서 누굴 팍 찌른다는 건 못하는 사람인거야... 어떻게 사람이 사람을 찌르고 희열을 느끼는 그런 경기를 한단 말인가.
그건 폭력이야 폭력...’ 등등의 말도 안되는 썰을 풀어놓으며, 이제 긴 칼 내려놓고 짧은 칼로 복귀해야지 했다.

 선수생활을 하며 또 다른 세상들을 구경해서일까.
무언가 쌈박한 변화를 갖고 싶어졌다.
​이래저래 돈도 조금 모았겠다.
이 깡통에 산지 어언 5년이 되었으니 새로운 작업장을 찾아봐야지 했다.
6개월의 집 구하기 시행착오을 거치는 과정에서 만나뵙게 되었던 한벗회관 백진앙선생님 과의 인연으로 한벗이동봉사대 봉사회원으로 활동도 하게 되었다.
차량이 없던 시절 한벗이동봉사대 도움을 많이 받았기에 조금이나마 갚고 싶었는데 돈은 없고 해서 차량봉사에 나선 것이었다.
그 덕분에 좋은 장애인분들을 많이 만나뵙게 되고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었다.
그러다가 맘에 드는 작업장도 찾을 수가 있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하지 않던가.

 그 공간은 조립식 건물이었는데 컨테이너박스보다는 덜 덥고 덜 추웠지만 몸이 약한 장애인이 지내기에 적당한 곳은 아니었다.
그래도 그곳은 일단 공간이 넓고 자유롭게 작업하기에 무리가 없어 그곳에서 본격적으로 공방을 운영하기 시작했다.
나에게 배우고자 찾아오는 수강생이 10여명이 훌쩍 넘었으며 중증장애인이자 여성장애인으로 목공예 작업을 하는 것이 신기했던지
매스컴에서 나를 집중적으로 다루기 시작했고 일년에 매스컴만 10여개를 했던 적도 있으니 실력은 미비한데 주변에서 대단하다 칭찬하고
인터뷰요청 들어오고 사람들이 찾아오니 구름위에 붕 뜬것처럼 되어 그때 인생조각에 실수가 찾아오게 되어버린 것이다.

 사람도 많이 찾아오고 공간도 넓어지다 보니 벌이에 비해 돈 씀씀이가 헤퍼졌고 공방운영미숙으로 인해 조금씩 삐거덕거리던 것이
친한 지인의 빚보증으로 인해 또다시 컨테이너박스때보다 더 못한 바닥으로 떨어지게 된 것이다.
천원 한장 꿔본적이 없는 내가 어쩌다보니 어마어마한 빚을 껴안게 되었고 이제 공방을 접어야지 하고 고양시 외진 외곽 살림하는 집으로 이사를 했다.
건강도 안좋고 빚까지 있는데다 나쁜 일들은 겹쳐서 온다더니 이사한 해에 그 동네가 침수가 되어 손발이 되어주던 차가 침수까지 되버린 것이었다.
당장에 이동시켜줄 차는 있어야하기에 차 구입을 하고 나니 빚은 더 늘어있었고..그런 걱정들에 같이 몸과 마음이 쇠약해져가고 있었다.

​ 정말 눈앞이 캄캄하고 이 모든 것을 헤쳐갈 자신이 없어 편안하게 죽어버리고만 싶었다.
그런 와중에도 매스컴은 꾸준히 했고 그때 걸려온 한통의 전화로 정신을 차리게 되었다. 티비 다큐멘터리를 촬영했는데..그걸 본 중증장애인이 전화를 준 것이다.

 "너무 다 잘하는 것으로만 티비에 나오지 마세요.
장애인들이 다 당신처럼 차도 운전하고, 하고 싶은 것도 하고 직업도 있고, 작품도 만들고, 이쁘게 옷도 입고, 배우고 싶은 거 배우고..
그렇게 다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예요.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중증장애인들이 더 많아요.
비장애인들처럼 다 할 수 있는 모습 말고 그냥 장애인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세요.
당신도 할 수 없는 일들이 있을 거 아니예요.
당신이 티비에 나온 것을 보고 가족들이 저한테 한마디씩 해요..
너도 저사람처럼 좀 해봐라..
저는 전신마비 장애인이예요.
팔은 사용하지만 손가락은 전혀 사용하지 못하죠..
그 말들이 저한테 얼마나 상처가 되는지 몰라요.
그러니 장애인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세요. ”

 솔직히 그 전화를 막 받고나서는 기분이 나빴다.
헌데 곰곰이 생각할수록 그 말들을 다시생각할수록 다 맞는 말들이었고 정말 하고 싶어도 못하는 장애인들이 더 많은 것이었다.
그런데 나는 할 수 있는데 왜 절망에 빠져 안하고 있지?..자괴감이 몰려왔다.

 중환자실에 누워 마취도 하지 않은 채 칼로 옆구리쪽을 뚫어 호스를 박던 기억..
​너무 아파 머리카락을 한 움큼 쥐어뜯었던 그 순간들..
​아기처럼 똥오줌이 범벅이 되어 비참했던 순간..
일어나지도 못하고 누워서 뜨거운 눈물만 뚝뚝 흘리던 그 순간들이 같이 오버랩되면서 내가 지금 이렇게 활동할 수 있는데..
왜 아무것도 안하려했나 깊은 반성을 하게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참 마음 아픈 그 장애우의 전화 한통화로 인해 ​방황에서 벗어난 나는 오랜 시간 질질 끌어오던 방송통신대학교를 졸업하게 되었으며
한국벤쳐공예대학을 거쳐 중앙대학교대학원 일반대학원에 입학하여 원하던 장승공예에 관한 논문도 작성하게 되었다.
​대학원 다닐 때는 여러 가지 어려움이 참 많았다.
일단 학부과정 공예과를 나오지 않아 학부과정을 경기도 안성캠퍼스에서 다시 배워야했고
안성캠퍼스는 장애인편의시설이 갖추어지지 않아 공부하고 이동하는데 불편이 많았다.
거의 자식뻘되는 아이들과 함께 수업을 듣고 더구나 장애까지 있으니 아이들은 나와 잘 어울리지 않으려 했고
학교생활에 필요한 정보를 제공해주지 않아 당황했던 적이 많았다.
그래도 이를 악물고 악착같이 공부하고 그 먼거리를 다녀 학부과정을 마치고 대학원 과정을 우수한 성적에 마칠 수 있게 되었다.

 국가의 도움을 받아 집문제와 빚,공부를 해결해가며 자신감을 얻은 나는 장승공예도 열심히 하여 세계휠체어테니스대회에
장승으로 트로피를 제작하고 베이징장애인올림픽때는 장승열쇠고리가 기념품으로 채택되어 500개가량을 납품하게 되고 떼돈도 벌게 되었다.
이어 한국벤쳐공예대학 인연으로 성협이란 업체와 솟대카렌더를 제작하게 되어 그 기념품이 해외대사관 220여개국에 들어가게 되는 영광스러운 일도 맡게 되었다.

​ 그때 뭐만들까공방에서 만들어야 하는 솟대가 50여일동안 10000개 가량 되어 일산직업훈련원 장애인들과 주변 장애인들 총 20여명을 고용하여
일자리 창출을 하고 분업화하여 같이 작업을 하게 되었다.
제작해야하는 솟대 양이 많았고 제작기간은 짧아 일하는 사람들을 너무 많이 고용하다보니
일 다 끝나고 난후 내손에 남은 돈은 37만원이었지만 여러 사람과 함께 하는 공동작업이 즐거웠고
장애인들과 함께 작업을 할 수 있다는 것이 또 그 물건들이 해외대사관으로 들어간다는 것이 참 보람된 작업이었다.

 그 외에도 목공예기술을 습득한 일산장애인직업훈련원의 본부인 한국장애인촉진공단이 주최하는
전국장애인기능경기대회 솟대체험 부대행사로 매년 참가하게 되어 후배장애인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었었다.
기술이 쌓이다 보니 내가 만드는 솟대,장승 소품들을 한국의 대표관광장소인 인사동, 북촌등에 납품을 하게 되었고
2014년도에는 한국장애예술인협회 방귀희선생님의 인연으로 박물관문화재단 문화상품공모전을 통해
국립중앙박물관,국립민속박물관과 입점계약을 맺어 물건을 납품하게 되었다.
아직 시작이라 매출은 시원찮지만 그래도 그런 인사동,북촌,박물관,전주한옥마을등
비장애인들과 어깨를 나란히 공예품을 납품하고 인정받는 것 자체가 내겐 더 소중하게 여겨지고 나에게 자부심을 불러일으켜준다.
인터넷 네이버에 뭐만들까공방이란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으며
그 블로그를 통해 그동안 나에게 장승공예를 배우러 제천,부산,울산,함양,상주등 전국에서 찾아오신 분들이 총 100여분 되신다.
장애인들이 더 많이 배우면 참 좋겠지만 장애인들은 10여분 다녀가셨고 비장애인분들이 90여분 정도 되신다.
우리공방을 찾으시는 분들은 나를 장애인으로 보지 않으신다.
나는 20여년의 공예기술을 익힌 숙련기술자이자 그들에게 작업동지 또는 싸부님일 뿐인 것이다.
그런 공예교육을 통해 비장애인들에게 장애인식을 개선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주었다 생각하며 장애는 몸만 불편할뿐 능력과는 무관하다는 것을 입증한 셈이다.

 마무리 조각을 마쳐가며 나란 작품을 조각하기 위해 순간순간 최선을 다한다.

 장애 입기 전에는 내가 거미줄 한가운데 존재하는 거미인줄 알았는데 살아보니 거미줄 한 올에 불과하다는 거..
나라는 한 올을 지탱해주기 위해 다른 한 올이 존재하고 그렇게 촘촘히 서로서로가 연결해주어 거미줄이 지탱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누구보다도 마음 아팠을 우리 가족은 늘 큰 힘이 되어주었고,
세브란스 병원에서 장애인도 멋지게 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정진완형님, 이은희자매, 컨테이너박스시절 목동 수레바퀴 그림사랑 전시장으로 이끌어주신 탁용준화백님,
그리고 사모님과 함께 찾아오셔서 대전 전시장으로 한국장애인미술협회 전시장으로 이끌어주신 김충현회장님도 참 고마우신 분이다.
몸 불편한 나를 계단으로 이동시키고 밥 먹여가며 지도해주신 우리 사부님 채용병선생님 정말 감사드리고
일산장애인직업훈련학교 선생님들도 내겐 큰 힘이 되어주었다.
라디오프로에 몇차례나 초대해주시고 박물관문화재단과 계약을 이끌어주신 한국장애예술인협회 방귀희선생님도 내게는 정말 소중한 귀인이시다.
정말 아름다운 거미줄들이 나를 지탱해주고 있었다.
장승공예가 김가윤의 꿈은 아름다운 쟁이이다.
장애입고 나서 그 주변인들에게 참으로 많은 도움과 희망을 얻었기에 이제 공예인으로써
세상을 조금이나마 더 아름답게 만드는 공예품을 꾸준히 만들고 그 결실을 어려운 이웃과 나누는 그런 아름다운 사람이 되는 거
누군가를 지탱할 수 있는 한 올이 되어주는 거..그것이 장승공예가 김가윤의 꿈이다.

 어느덧 세월이 훌쩍훌쩍 가버려 흰머리와 잔주름, 까만 피부도 손도 말투도 모든 것이 거칠어져 버린 것만 같다.
으... 갑자기 조금 괴롭다.
외부로 드러난 것들이 다는 아닌 걸 잘 아는데도 관리를 하지 않아 망가진 외모를 보니 조금 서글픈 건 사실이나
내가 선택한 목공예가의 길이다.
나무조각은 나에게 있어 내 삶을 지탱시켜주는 공기와도 같은 가치를 지니고 있다.
목공예는 나를 자립시켜준 고마운 후원자이자 나도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일깨워주었고
나의 정체감을 찾아주고 삶의 기쁨을 알려주고 생의 의미를 알려주고 나를 살게 해주는 생명수이다.

 사람들이 내게 ‘대단하십니다’ ‘용기 있으십니다’ ‘의지의 장애인’ ‘본보기’ 라는 말을 많이 한다.
그러나 나 그들의 기대를 저버리고 한 인간으로서의 소중한 내 꿈을 실현시키고자 현재의 삶을 살고 있다.
장애인 비장애인을 떠나 한사람의 쟁이로서의 길을 걸어 갈 것이다. 하나를 얻으려면 하나는 포기해야지.
아직 그리고 너무 늦은 것도 아니다.
지금부터 곱게 늙어 가면 되니까 내면의 아름다움을 더 가꾸고 진정한 쟁이가 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면 그게 바로 참다운 아름다움 아니겠는가.

 그래도 난 내가 좋다.
지금의 내 모습이 사랑스럽다.
난 나를 사랑한다.
이 지구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나의 고귀한 삶인 것이다.
나 지금 살고 있다.
 
장애인+장승+장인 이렇게 3장이 합쳐지면 뭔지 아는가..

바로 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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